슬라이드1

“채널을 바꾸라”

<사도행전 16:16~25> 

 

 

 

[Audio 말씀]

 

 

두 달째 지역사회격리(ECQ) 중이라 이전에 못 보던 영화나 드라마를 접할 일이 많아졌는데, 얼마 전엔 가족들과 함께 넷플릭스를 통해서 『인간수업』이라는 10부작 드라마를 봤습니다. 주인공들이 교복을 입고 있어서 청소년드라마인줄 알았더니, 청소년들이 보기에는 너무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들이 많이 나와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머리가 비상해 공부는 아주 잘 하지만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혼자 불우하게 살고 있는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메신저 앱을 통해 성매매를 알선하는 ‘넷플릭스의 N번방’과 같은 드라마입니다. 그 안에는 청소년 성매매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인공은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자금을 벌어놓겠다는 명목으로 그 일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접어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일과 계획이 꼬이기 시작하고, 자신이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중간 중간에 돌이킬 수 있는 순간들이 몇 차례 오기도 하는데, 그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 선택으로 인해 어떤 결과들을 책임져야 하는가를 이 드라마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포스터 부제에서 “틀린 답에 목숨을 걸었다.”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결국 그 잘못된 선택을 돌이킬 수 없었고, 끔찍하고 잔인한 결말을 맺게 됩니다. 틀린 답에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시청자 입장에서 우리는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웃으며 볼 수 없었던 거 같습니다. 만약 주인공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느꼈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돌이켰다면 해피엔딩까지는 아니더라도, 열일곱 살짜리 어린 소년의 인생이 그렇게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은 잘했거나 혹은 잘못된 선택일 수 있습니다. 만약 잘못된 선택이라고 느껴졌을 때, 그 틀린 답에 목숨을 걸 필요가 있을까요? 잘못된 채널이라면 더 이상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채널에서 나의 귀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 채널을 바꿀 때 새로운 인생, 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1. 채널을 바꾸라

바울 사도 일행은 소아시아라고 하는 오늘날의 터키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고, 각 도시마다 여러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을 순회하며 각 교회들과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했고, 각 지역의 교회들은 그 수가 날마다 늘어나는 부흥의 역사들을 경험했습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은 그렇게 성도들이 믿음으로 견고하게 세워지고, 교회들이 수가 많아지고 부흥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신나는 목회지에서 오랫동안 목회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지만 사도행전 16장 6절 이하에 보면 성령께서 더 이상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 사도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 소아시아 북부 쪽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 역시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밤에 환상 중에 그리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라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일행은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했고, 그곳에 예비 된 영혼인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라는 여인을 전도하게 되었고,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게 되고, 루디아는 자신의 집을 순회전도단인 바울 일행이 머물 거처와 전도센터로 내어주게 됩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기도하다가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고, 마게도냐로 가라 해서 갔더니 그곳에서 예비된 영혼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를 통해 마게도냐 전도를 위한 베이스캠프까지 한 번에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 다 준비하고 계시는 형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 빌립보 성에는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가 있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신내림 받은 무당 점쟁이’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종에게 그런 귀신이 들려서 신기하게도 점괘가 잘 맞는 겁니다. 때문에 그 여종의 주인들은 그 여종의 점괘를 통해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영적인 존재라 바울과 실라를 알아보고 그들을 따라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여러 날을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귀신의 존재와 하나님이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귀신의 말을 통해 오히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변질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이 그 귀신들린 여종 때문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17절을 보시면,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그래서 바울이 그 귀신들린 여종을 향해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선포하자 귀신이 그 여종에게서 즉시 나오게 됩니다. 귀신에 매여 있었던 그 여인과 우리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일입니까? 한 사람의 인생이 치료받아 바뀌었으니,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19절을 보시면,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하지만 그 여종과 우리와 달리 그 여종의 주인들은 이제 그 여종을 통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외지인이었던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 끌고 가 억울한 누명을 씌어 고발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지역사회를 어지럽히고 소란하게 한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의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그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많이 친 이후에 쇠스랑으로 묶어 그들을 깊은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상황입니까? 또 아시아 사람이 유럽으로 건너갔더니 이방인이라고 재판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많이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니 내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서 언제 나갈 수 있을지?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죽음의 위기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타국에서 그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예기치 않은 어려운 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코로나19사태는 우리에게 갑작스런 삶의 변화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3~4개월 동안 우리 모두는 매우 힘들고 답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고, 이 사태가 언제쯤 진정될지 모르고, 코로나 이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도 어떤 분 얘기 들으니 어떤 분이 올해 어떤 업체를 새로 인수했는데, 사태가 길어지니 몇 개월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업을 정리하고 돌아가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세부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는 남의 얘기가 아닌 겁니다. 내일의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이 왜 안 들겠습니까?

불안할 수 있습니다. 낙심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실패하고, 이렇게 망해서 인생의 루저가 될 거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 번 어떤 나쁜 생각에 빠지기 시작하면 계속 그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점점 불길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낙심되는 생각들에 젖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도 끌어다가 미리 불길한 그림들을 그리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살아가다보면 서로 마음이 상할 수도 있고, 다툴 수도 있고, 감정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족 간에도,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친구나 동료 그리고 교우들 간에도 얼마든지 그런 상황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정적인 쪽으로 자꾸 치우치는 것입니다. 미운 마음이 더 커지기도 하고, 섭섭한 생각들을 자꾸 떠올리기도 하고, 상처 받았던 말들을 한 번 더 되씹기도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어떻게 상대를 공격할지, 어떻게 눌러줄지, 어떻게 갚아줄 지를 자꾸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채널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답에 목숨을 걸고 있는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그 채널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채널을 바꿔야 합니다. 믿음의 생각으로, 긍정적인 생각으로, 변화와 치유와 회복과 화해와 평안과 덕이 되는 모습으로 채널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행복의 힘(생각연구소)』이란 책을 지난 주간에 다시 꺼내서 읽어봤습니다. 이 책에 오른 손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 한 운동선수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축구를 좋아했고, 축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병원에 가서 자신이 축구를 할 수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서 몇 가지 검사와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와 마주 앉았는데, 의사가 그에게 어떤 장애가 있는 지 물었습니다.

이 때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장애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오른 손이 없을 뿐이예요.”

 

여러분 이 얼마나 멋진 말이며, 멋진 생각이며, 멋진 사람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오른 손이 없이 태어났다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세상을 비관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의 신체 탓을 하며 사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부정적인 채널에 갇혀 인생과 시간을 낭비하며 자신의 인생을 점점 더 불행으로 몰아넣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채널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채널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행한 인생에서 행복한 인생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2. 채널을 고정하라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쇠사슬에 매여 깊은 감옥에 갇혀버렸습니다. 그 감옥은 작은 빛조차 들어오지 않고 곰팡이 냄새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한 공간이었습니다. 불안함과 두려움, 절망과 낙심의 깊은 한숨 소리만 그 공간에 가득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죽고 싶을 만큼 힘든 그런 순간들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들을 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일을 알 수 없고, 억울하고 분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재정적으로 바닥이 나서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기도 하고, 나만 홀로 뒤쳐진 거 같은, 인생의 실패자와 같다고 느껴질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 어떻게 하라구요? 그 채널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채널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채널을 돌리면서 정말 내가 고정해 놔야 할 새 채널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머물면 안 됩니다. 점점 더 나를 실패와 절망으로 짓눌러 버릴 그 채널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일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갖고 살 새로운 채널로 바꾸셔야 하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시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쇠사슬에 매여 억울한 죄수가 되어 깊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지금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다 할지라도 그 절망과 비관의 채널에 갇혀있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즉시 채널을 돌렸습니다. 믿음의 채널로 돌리고, 하나님 앞에 그 모든 상황을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으로 채널을 고정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때보다도 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가장 위대한 일들을 준비하고 계실 때, 그것을 첫 번째로 알아차리는 것은 우리의 원수 마귀입니다.

우리가 잘되는 것,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것,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있는 것, 형통과 승리의 역사의 주역이 되는 것, 믿음의 간증자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을 가장 시기하는 존재는 마귀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가장 위대한 일을 준비할 때, 마귀는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가장 힘겨운 싸움을 우리에게 걸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고, 넘어뜨리고, 그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지게 만들려고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 말씀에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전도여행 중에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그래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다고 당시의 일들을 회상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통해 철저하게 훈련 받은 것이 있는데,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죽음도 바울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훈련된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이 죽음의 깊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이란 채널에 고정시켰던 것입니다.

 

26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바울과 실라가 찬송할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의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을 묶고 있던 것들이 다 풀려졌던 것입니다. 믿음의 채널, 기도의 채널, 찬송의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던 바울과 실라의 죽음의 쇠사슬이 풀리고, 죽음의 감옥 문도 열려졌습니다.

앞부분에서 잠시 말씀 드렸던 『행복의 힘』이란 책에 있는 또 다른 이야기 하나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 테니시주의 한 마을에 한 미혼모 가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 특히 테네시주와 같은 보수적인 마을에서는 미혼모를 그리 좋지 않게 봤습니다. 때문에 미혼모의 어린 아들까지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녀가 그 아이와 놀지 않도록 주의를 주기도 했습니다. 심술 맞은 사람들은 “왜 저런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살지? 대체 쟤 아버지는 누구야?”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년과 그의 이름 모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수군수군하거나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그런 불안감과 조롱 속에서 살며,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점점 더 소극적이고, 내성적이 되었고, 열등감에 젖어 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 교회에 열정과 은사가 넘치는 젊은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조용하던 시골 마을이 그 목사님으로 인해 들떠 있었고, 누구든지 모이면 그 교회와 목사님의 이야기가 화젯거리였습니다.

소년은 태어나서 한 번도 교회에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년도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주일날 느즈막이 교회에 도착해서 몰래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년은 그날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포용감을 느꼈습니다. 원래 소년은 일찍 교회를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예배의 감격에 젖어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곤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출입구에서 예배당을 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부임 후 처음 보게 된 그 소년에게 “꼬마야, 너는 누구의 자녀니?”하고 다정히 물었습니다. 그 순간 주변에 정적이 흘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을 사람들은 그 소년이 미혼모의 아들이란 것을 알았고, 새로 오신 목사님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도 순간 당황했습니다. 자신은 버림받았고, 아버지가 없는 아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소년은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목사님은 뭔가 잘못되었고,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곤 순발력 있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나는 네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단다. 정말 많이 닮았구나. 꼬마야, 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란다.”

이 말에 소년을 향해 수군대던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예배당을 빠져나가야 했습니다. 소년은 자신을 다시 보기 시작했고, 소년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었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라는 열등감과 불안감과 상처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제 소년은 더 이상 버림받은 열등한 아이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출생이 어떻든지, 여러분의 가정 배경이 어떻든지, 여러분의 지금 상황이 어떻든지, 여러분의 능력이 얼마나 되든지… 기억하십시오. 이 모든 상황은 전혀 관계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나는 새와 들의 풀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 잘못된 채널로 인해 불안해하고, 열등감에 젖어있고, 낙심과 염려 속에 있다면 이제 바울과 실라와 같이 그리고 테네시의 한 소년과 같이 채널을 고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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