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8~29>
–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4) –
[Audio 말씀]
요즘 뉴스를 켜면 참 별의 별 일들이 다 있습니다. 며칠 전 우리나라의 유명 프렌차이즈 갈비집에서 ‘폐기해야 할 고기를 소주에 빨아 재판매 했다.’는 뉴스(JTBC)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우리 아들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먹는 음식을 갖고 그런 비양심적인 일을 했다는 것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습니다.
그래서 그 뉴스를 찾아 봤더니 의정부 옆에 송추에 가면 계곡 옆에 정말 유명한 갈비집이 있는데, 저도 의정부에서 생활할 때 가끔 가서 고기를 맛있게 먹었던 식당이었습니다.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되고, 대기자 명단 올려놓고 1시간은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유명한 고깃집 입니다.
원래는 10평정도 되는 작은 가게에 테이블 4개 놓고 시작한 갈비집이었는데, 나중엔 너무 유명해져서 약 30여개의 체인점에, 900여명의 직원들을 둔 정말 대단한 갈비 프렌차이즈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미 연매출 1천억 원을 넘어 승승장구하는 중견기업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폐기해야 할 양념갈비를 소주에 빨아서 재판매했다는 것은 갈비집으로서는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고객들에게 깨진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는 적잖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지금 당장 매출이 좋고, 세상에서 유명하더라도 중간에 이런 일 하나 터지면 그 엄청난 기업도 하루아침에 몰락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5절 말씀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세계신기록을 갖고 있는 육상선수가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뛰면 1등으로 들어와도 탈락하는 겁니다. 진정한 승리자가 되길 원한다면 법대로 경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국 100대 한식당에 선정될 정도로 유명한 프렌차이즈라고 하더라도 정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승리의 면류관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찬란한 영광과 부흥의 역사를 쓴 교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그 부흥기가 끝나고, 더 이상 세상에 영향력이 없는 그냥 교회로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 부흥기가 끝났을까요? 왜 세상에 영향력을 잃어버렸을까요?
어떤 사람은 성공도 하고, 세상에서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에게 인기도 있고, 큰돈도 벌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순간에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 그 모든 영광의 자리에서 쫓겨나듯이 내려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디모데후서 2장의 말씀과 같이 법대로 경기하지 않았을 때, 정도에서 벗어났을 때, 불법을 행했을 때, 잘못된 탐욕과 정욕의 노예가 되었을 때, 부도덕적인 여러 가지 중독에 매여 있었을 때…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의 교회들과 성도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지금부터 주님 나라 가는 그 순간까지 이기는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교회는 점점 더 흥왕하고 승리하는 교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1. 죄의 틈을 주지 말라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 관한 말씀입니다. 두아디라는 우리가 두 주에 걸쳐 살펴봤던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의 중간쯤의 동편에 위치한 교회였습니다. 풍부한 곡물과 자줏빛 염색약품 공업으로 유명한 소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가 마게도냐 환상을 통해 오늘날의 그리스 땅인 마게도냐의 첫 번째 성 빌립보에 들어갔을 때 첫 번째로 전도한 사람이 자색 옷감 장사였던 루디아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자줏빛 염색약품 공업이 발달했었던 두아디라 지역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루디아는 두아디라와 빌립보를 오고가며 장사를 했었던 거 같은데, 그 때 빌립보에서 바울 사도를 통해 그와 그의 집에 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고, 자신의 집을 빌립보 최초의 교회와 선교본부로 내어 놓은 여인이었습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의 두아디라교회는 루디아가 빌립보에서 예수를 믿고 다시 두아디라의 집에 돌아와 세운 교회일 수 있습니다. 또는 바울 사도가 전도여행 중에 이 교회를 세웠을 수도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소아시아의 첫 번째 교회로 말씀드렸던 에베소교회의 경우에는 주님을 향한 처음의 그 사랑이 식어버렸던 교회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책망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는 그들이 주님을 향해 행한 봉사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교회라고 칭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까? 그들은 처음에는 믿음도 없었고, 교회와 이웃을 위해 봉사하지도 못했고, 헌신하지도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해가 갈수록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헌신도 자랐습니다.
예수 믿은 연수가 늘어 가는데 도리어 믿음이 더 퇴보하고 있다면 이처럼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그 만큼 성숙해져야 하는 겁니다. 나이만큼 더 커지고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처음의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봉사와 섬김과 희생이 예전만 못하다면 우리의 믿음은 점검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겁니다. 영적으로 병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치료가 필요하고, 변화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소도시였던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 기특하신 것입니다. 처음 누구로부터 복음을 들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어떻게 어떻게 무명의 누군가에 의해 복음이 도시에 들어왔고, 그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니 두아디라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도 주목받는 교회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교회였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믿음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믿음이 되길 축복합니다.
20절 말씀을 보시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두아디라 교회에도 책망할 일이 있으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의 활동을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구약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 왕의 왕비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 안에 있었던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의 이름이 이세벨일 수도 있겠지만, 아합의 왕비로서 북이스라엘 왕국을 철저한 바알 우상숭배의 나라로 물들였었던 왕비 이세벨을 상징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던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는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누군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록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 내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었던 여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그 여자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지어서 말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천주교가 유교적 전통을 갖고 있었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전도를 하다 보니 제사문제가 걸렸습니다. 그래서 조상제사에 관한 문제에 대해 교황청의 가르침을 요청했습니다.
1939년 당시 교황은 “조상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며 사회 문화적 풍속”으로 시신이나, 무덤, 위패 앞에서 절하는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천주교는 추석과 같은 명절이 되면 예배당에다가 제사상을 차려놓고 신도들이 거기에 절을 하며 합동위령미사라는 것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합동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이 얼마나 기막힐 노릇입니까? 성경을 읽어본 사람, 성경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우상숭배요.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의 자칭 선지자였던 이세벨이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렸고, 거기에 넘어간 사람들은 그것이 문화풍속이라고, 우상숭배인줄도 모르고 그렇게 영적으로 병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단들도 성경을 갖고 말하고, 성경 구절 이것저것 늘어놓으면서 뭔가 영적으로 기존 교회 목사들보다 더 깊은 지식이 있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자칭 선지자라고 말하는 이세벨과 같은 겁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가는 겁니다. 왠지 그 사람이 영적으로 더 깊고, 그 사람만이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 내에 그런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었을 때, 그 거짓 교사와 가르침에 대해서 단호했어야 합니다. 그것을 용납하면 교회는 금세 거짓 사상에 물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병들어 버리게 되고, 병이 들면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고, 심하게는 영적으로 멸망에 이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말씀에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마귀는 밖으로부터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겁을 주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며 더 견고하게 믿음으로 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작은 틈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틈으로 살짝 들어와 점점 우리를 영적으로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인들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도 잘 드리고, 기도생활도 하고, 말씀도 읽고, 봉사와 구제와 섬김도 잘 하는데… 나의 약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열등감일 수도 있고,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술과 도박 혹은 게임과 같은 어떤 중독적인 것일 수도 있고, 이성에 대한 정욕일 수도 있고,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탄이 이것을 기가 막히게 잘 압니다. 그래서 그 틈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사탄은 그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건드려서 우리가 죄에 빠지게 만드는 겁니다. 사탄의 목적은 그렇게 우리를 무너뜨리는 데 있습니다.
분명 우리에게 약한 부분이 있고, 틈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혹이 있을 때마다 말씀과 믿음으로 그 약함을 바라보십시오. 나는 약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주시면 그 약함도 도리어 내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내게 약함이 도리어 그리스도 능력이 내게 머무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넘어가지 마십시오. 죄의 틈을 주지 마십시오. 여기서 무너지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을 다 잃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2. 기회를 놓치지 말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님 중에 한 분이시고, 말씀도 좋아서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주일설교 말씀이 업데이트 되면 보통 조회수가 10만회에서 20만회를 기본적으로 찍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세요. 몇 년 전에 우연히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목사님께서 “저는 앞으로 10여년만 더 사역하다가 아무 사고 없이 은퇴하면 그것으로도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시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 중에는 사회적 비난과 지탄을 받을만한 사건과 사고의 주인공들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사람은 약하다는 겁니다. 오늘은 내가 누군가를 손가락질 하며 혀를 찾지만, 어느 날 나 역시 그런 실수와 그런 죄로 비난 받는 자리에 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는 게 연약한 우리 인간의 진짜 모습인 거 같습니다.
로마서 3:10~12절 말씀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게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결심하고 결단하지만 또 넘어질 수 있을 겁니다. 또 실수하고 또 범죄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2장 21절을 보시면,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을 향해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실수했다고, 범죄 했다고 즉시 벌하시고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기다려 주십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은 ‘회개(悔改)’ 즉 죄를 뉘우치고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 시간과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과 그 교훈에 따라 음행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2절, 23절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 그들을 큰 환난 가운데 던져 버리고, 그들의 자녀를 죽이시겠다는 무서운 심판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23절 하반절에 그들의 행위대로 그대로 갚아주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범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린 연약합니다. 주님께서도 내가 그렇게 연약한 걸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게 시간을 주셨고, 아직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죽는 일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 사람에게 어떤 전조증상이 있었을 겁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몸의 작은 신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호를 받아들이고 병원에 가서 진찰받고 치료 하면 그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쓰러져 죽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징조들과 전조현상들을 무시하면 큰 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인생에도 갑작스럽게 어떤 일이 터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신호를 주십니다. 경고를 하십니다. 어떤 사건들과 환경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선
“얘야, 너 더 이상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이걸 보고서도 계속 그 길로 가다가는 더 큰 사고가 날 것이다. 이제 멈춰라. 이제 돌이켜라. 이제 회개하라. 이제는 변화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1849년 12월 영하 50도에 이르는 추운 겨울 러시아의 한 광장에서는 사회주의 개혁 사상가 21명의 총살형이 집행될 예정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28살의 전도유망한 한 청년 작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형집행관은 “사형 전 마지막 5분을 주겠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청년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사용할 지를 순간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사형장에 함께 끌려와 죽게 된 동료들과 작별인사 2분,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고 정리하는데 2분. 그리고 남은 1분은 아름다운 자연을 한 번 둘러보는데 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곤 눈물을 흘리며 함께 죽게 될 동료들과 인사를 하고, 지난 세월을 후회의 눈물로 흐느끼며 돌아보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조금이라도 더…’ 그 때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가 심장을 뚫는 듯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황제의 명령이오. 형 집행을 멈추시오!”라는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그들은 극적으로 살아났고, 황제는 사형대신 그들을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이 청년 작가가 장차 러시아의 대문호가 될 ‘도스토 예프스키(Fyodor M. Dostoevsky, 1821~1881)’였습니다. 그는 5kg이 넘는 족쇄를 달고 유배생활을 했었지만, 그의 인생을 조금도 낭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인생은 5분의 연속이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고, 유배생활을 마친 후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쓰게 됩니다.
그는 훗날 『백치』라는 장편소설에서
“언제나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신호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변해야 삽니다. 회개해야 변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