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15~17>
– 믿음의 기업(2) –
우리나라 전국에 CCTV가 몇 대나 설치되어 있을거 같아요? 2014년 말 전국 지방자치단체 통계에 보면, 공공기관 및 거리에 설치된 CCTV는 264,476대입니다. 그런데 CCTV는 누구나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민간에 설치된 CCTV는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습니다. 다만 2011년 자료에 의하면, 250~450만대를 추정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자동차에 블랙박스를 설치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시내를 돌아다니는 자동차가 2천만대가 넘었으니깐, 여기 저기 나도 모르게 찍히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CCTV의 범죄 억제효과가 있을 거 같습니까? 2013년 대전대 경찰행정학과 교수진의 연구에 의하면 강북구 대상 조사 통계(CCTV 설치 전후20일)에 의하면, 성폭력은 13건->3건으로 줄고, 절도는 74건->29건으로 감소하고, 폭력은 108건->89건으로 줄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범죄 억제에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더 조심하게 되는 겁니다. 꼭 CCTV가 있어야만 범죄가 억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매를 들고, 협박하고, 강제적으로 해야만 듣는 것은 짐승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CCTV가 없는 곳에서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이집트(애굽)에서 소수민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순간 큰 민족(약2백만 명)이 되자,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노동을 시켰고 그것으로도 인구가 줄어들지 않자, 이번에는 산파들을 통해 더 이상 이스라엘 인구가 늘지 않도록 명령합니다.
16절을 보시면,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왜냐하면, 여자는 힘이 없으니깐 종으로 쓸 수 있는데 남자의 경우는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고, 계속해서 히브리인을 생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의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라는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17절입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고대의 왕들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였습니다. 명령했는데 불복종하면 ‘저 놈의 목을 당장 내리쳐라’ 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즉결 심판 받는 겁니다. 무슨 인권이라든지, 재판을 한다든지 그런 절차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산파들이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끔 우리가 하늘을 향해 소리쳐도 아무 소리도 돌아오지 않기도 합니다. 반대로 애굽의 왕은 살이 떨리고 무릎이 떨릴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지금 산파들이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기들을 살렸다는 것은 ‘이렇게 죽어도 좋다’라는 결단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애굽의 왕이 너무 무서운 존재였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사내아이들을 결코 죽일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지조를 갖되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칼빈이나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Coram : 앞에 + Deo : 하나님>이란 단어가 합해져서 ‘하나님 앞에서(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이란 뜻입니다.
멋진 인생,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전에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코람데오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