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

<로마서 4:25>
– 고난주간(1) –

기독교 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추종하는 두 개의 종교가 있다면 ‘불교’와 ‘이슬람’일 것입니다.

불교는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 고타마(BC.624~544?)’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고타마는 인간의 삶에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끊이지 않고 계속 돌고 도는 윤회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수행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불교의 기원이 됩니다. 그리고 35세 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고 자신이 깨달은 도를 통해 사람들을 교화시키려 힘쓰다가 80세에 죽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아라비아의 ‘무함마드(AD.571~632)’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는 25세 때 큰 부자 상인 과부였던 ‘하디자(40세)’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경제적인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는데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게 되자, 그의 종교적 감수성으로 인해서 금식과 사색을 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히라 산(山)’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중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슬람신앙을 포교하기 위해 나라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정복전쟁을 통해 포교하다가 병에 걸려 집에서 죽게됩니다.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 고타마’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나 한 개인의 모습으로는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진리를 깨닫기도 하고, 많은 사람에게 나름대로 어떤 훌륭한 가르침을 한 종교적 교사요,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과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종교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을 깨우치고 가르치는 종교적교사나 선지자로서의 역할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죽음’입니다. 고타마도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그냥 죽었어요. 무함마드도 이슬람을 포교하다가 병에 걸려 죽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 로마서 4:25절에서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에 있었던 속죄제사에 대한 원리가 먼저 이해되어야 합니다. 레위기에 나타난 구약의 제사를 보면,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을 때 그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 벌을 가축이 대신하여 받았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9:22절 말씀에서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벌로 피를 흘려야 하는데, 구약시대 때는 가축이 대신 벌을 받아 죽었던 겁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가축을 데려와 죽여야 했습니다. 자신이 키우던 죄 없는 가축이 대신 죽으니 주인 입장에서는 얼마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 마음으로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 되었던 겁니다. 하지만 사람은 연약한지라 또 죄에 빠지고 또 죄에 빠져 계속해서 가축을 죽이며 죄 용서를 받아야 했습니다.

특히 대속죄일(종교력 7월10일)에는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모든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양을 희생시켜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셨을 때에는 제사장이 살아서 나오게 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 속죄제사를 받지 않으실 때에 대제사장은 그 지성소에서 벌을 받아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성경적 원리에 의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그 속죄의 제사를 성공적으로 드린 후 하나님께서 그 속죄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의미로 살아 무덤에서 나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고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싯다르타 고타마, 무함마드 같은 사람이 한 개인으로서의 훌륭한 인생을 살았을지 모르나 그들은 우리의 죄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들도 죄인이었고, 그들 역시 그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그 죽음에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주님의 그 고난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그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며 감사의 시간을 보내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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