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양과 질”

<마태복음 6:7~8> 
– 다니엘 하루3번 기도(새벽⑦) –

신앙생활 중에 개인 경건생활의 아주 중요한 기둥 하나가 ‘기도’입니다. 많은 목사님들께서 기도를 강조하시고, 우리 교회 역시 ‘필리핀에서 제일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저의 기도제목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성도가 마귀를 두렵게 하고, 기도하는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계속해서 기도 프로그램을 갖고 있습니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도

– 2020 비전을 위한 [40일 금식기도회] : 작년10~11월
– 한국교회와 함께하는 [다니엘 기도회] : 작년 11월
– Jesus Coming [특별새벽예배] : 작년 12월
– 2017 신년 [다니엘 하루3번 기도] : 올해 1월

그리고 3주간 진행되는 ‘다니엘 하루3번 기도’를 진행하면서, 다음 주부터는 약 60여 일간 진행되는 ‘성전 확장 이전을 위한 [1.23+3.24 팀 능력기도회]’를 남전도회, 여전도회, 청년부 등의 팀과 함께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교회에는 거의 초신자 분들도 많고, 이곳에 오셔서 믿음 회복하신 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기도 프로그램이 버거우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그 중 한 분 한 분이 기도하는 분으로 세워지기만 한다면 저는 감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존 낙스(John Knox, 1513~1572)’가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낫다”라고 말한 바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가 중요하다면 기도의 양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기도의 질이 중요할까요? 먼저, 정답을 말하자면 기도의 양과 기도의 질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오해되는 부분들은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7절을 보시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이교도들은 어떤 종교적 행위와 공로와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해서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불교에도 100일 기도, 1000일기도…와 같은 여러 가지 기도가 존재합니다. 어떤 불교 사이트에 이것을 정의하기를

“불자 혹은 중생이 꼭 이루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 경우, 스님께서 100일 동안 매일 하루 3번씩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께 간절히 발원하여 이 공덕으로 소원이 이뤄지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합니다. 소원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그 양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염불을 한다는 것도 ‘나미아미타불 관세움보살’을 계속 반복합니다. 일본의 ‘남묘호렌게쿄’ 역시 수백, 수천번을 반복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심지어 천주교 역시 수십 가지의 기도문이 따로 있어 그것을 계속 반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 한자로 ‘다시 부(復)’자를 써서 ‘계속 같은 말을 반복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기도를 드릴 때 한 달 동안 혹은 1년 혹은 20년 동안 같은 기도를 계속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의미 없는 말들을 단지 기도의 시간을 채우고 양을 채우려고 중얼 중얼 늘어놓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건 이방인들이 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8절에서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깐 중요한 것은 그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정말 그 안에 간절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실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 아시니깐 용건만 간단히 하나님께 말하면 될까요? 기도를 타종교인들과 같이 또는 이방인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니깐 자꾸 그런 오해들이 있는 겁니다.

기도의 양과 질 모두 중요하다고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우리의 영적인 호흡입니다. 또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하늘의 아버지와 아들인 우리 사이에 인격적 교제의 차원에서 기도를 이해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안에 우리의 필요를 아뢰고,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도 당연히 있는 겁니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은행 통장처럼 생각한다면 그 아비의 마음이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나 은행 통장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에 공감하고, 때로는 그 필요를 채워주기도 하고, 진정으로 아들을 돕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에 따라 그 시기와 때를 정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 기도자인 아들은 영적으로 점점 더 성숙해 가는 겁니다. 당장의 필요가 채워진다고 철이 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도의 양과 질 모두가 너무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많은 기도를 드리더라도 중언부언 하지 마시고, 또 짧은 기도를 드리더라도 대충 하지 마시고, 진실하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기도를 통해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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