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웃게 될 것이다”

<창세기 17:15~22> 

얼마 전 우리 집사님하고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집사님이 제게 “목사님, 하나님은 참 개구쟁이신거 같아요. 무엇이든지 쉽게 주지 않으시고 꼭 어렵고 힘든 과정 속에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 끝에 주시는 거예요” 그러시는 겁니다.

우리 집사님이 개구쟁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든 쉽게 주시지 않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이든 쉽게 얻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쉽게 얻은 것은 그 만큼 그것에 대한 가치도 모르는 겁니다. 또 쉽게 얻었다면 그것에 대한 감사 역시도 모르며 살게 될 겁니다.

그러나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어렵게 얻었다면 그것은 그에게 더욱 가치가 크고,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눈에 보여 지는 어떤 필요를 채워주시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생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 그리고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성품과 믿음의 영역을 다듬고 훈련시키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의 필요의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과정을 통해서 더 성숙한 인격과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수였던 하갈을 통한 이스마엘의 출생 사건이후 하나님께서는 약 십사오년 간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나이 99세 때 나타나셔서 과거 주셨던 언약을 재확인하고, 언약을 더 구체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시는 겁니다(1~8절). 그리고는 그 언약의 표징으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명령하셨고(9~14절),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그리고 모든 종들까지 모두 할례를 시행하게 됩니다(23~27절).

그런데 15절과 1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셨습니다. 5절에서 아브람(‘가문의 어른 : 높으신 아버지’란 뜻)을 아브라함(‘여러 민족의 아버지’란 뜻)으로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아브라함의 처 사래(‘나의 공주’라는 뜻)를 사라(‘공주, 여주인’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바꿔 주시는 겁니다. 사래는 가정이나 가문에 갇힌 좁은 의미의 공주이고, 사라는 더 넓은 의미 그래서 ‘열국의 어미’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이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고, 사라는 열국의 어미가 되는 겁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요? 17절, 18절에서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지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지 24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지난 24년을 지냈지만, 너무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았고, 하갈 사건 이후로는 하나님께서도 십사오년 동안 침묵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작은 희망의 끈조차 놓아 버린 겁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이고 하나님, 저하고 사라의 나이가 얼마인데요. 이젠 포기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하나님 안 믿는 거 아니구요. 이 나이에 사라가 아이를 갖는 것도 너무 무리예요. 저 괜찮아요. 그래도 이스마엘이라도 있으니 이스마엘이나 축복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9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은 장차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서 거듭 그 언약을 확인시켜 주시는 겁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이삭(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후에 아들 이삭을 낳고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을 만큼 나이도 들었고, 세월도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웃게 하시는 겁니다. 쉽게 얻었다면 그들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주시고, 응답하시고, 결국 그들이 웃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개월간 ‘새 성전 확장 이전공사’를 하면서 제 안에 반복되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분명 이 새성전확장공사는 내 의지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명령과 우리 교회에 주신 미션이 있어서 시작한 건데, 왜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많고, 장애물이 많지? 주님의 뜻으로 진행하는 건대 왜 형통하지 않지?…’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새 성전 공사를 하기 전 준비단계 때 제가 우리 성도들과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에 따라 ‘새성전공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미션입니다. 이것은 결코 돈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고, 기도로 감당해야 하는 겁니다’라고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되돌아보니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조금씩, 하나씩 하나씩 새 성전이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을 보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여러 가지 시련이 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시련의 끝에서,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은 나로 웃게 할 것입니다.

Tags: No tags

Add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