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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택”

<마가복음 2:13~17> 

 

 

지난 8월부터 9월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2018 아시안게임의 축구 경기는 우리국민에게 큰 기쁨과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런데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김학범 감독(1960~, U-23 감독)’은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우리나라 축구팬들로부터 많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인맥축구’니, ‘축구적폐’니… 하면서 김학범 감독의 선수 발탁에 문제를 삼고 비난했습니다.

특히 일본의 J리그 ‘감바 오사카’ 소속의 공격수 ‘황의조 선수(1992~)’를 발탁한 것에 대해서 비판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뛰는 탁월한 선수가 있는데, 왜 한 단계 낮은 J리거를 발탁했느냐? 는 겁니다. 그리고 과거 김 감독이 있었던 팀에서 이 선수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인맥으로 누구 끼워 넣은 거 아니냐? 축구 적폐 아니냐? 이런 식으로 비판을 가했던 것입니다. 성남시의 어떤 시의원까지 나서서 자신의 SNS에 “인맥축구는 계속됩니다!! 공격수 넘치는 마당에 황의조???? 수비수를 보강해야 될 와일드카드 한자리를 이렇게 낭비하니 축협비리를 파헤치고 정몽규가 물러나지 않는 이상 계속 반복될 일입니다.”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2018 아시안 게임 축구 ‘금메달’을 획득했고,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황의조 선수는 두 경기에서 3골씩 터트리는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펄펄 날며 아홉 골을 기록하면서 이 대회 ‘득점왕’에 오르게 됩니다. 김학범 감독이 선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리 두각을 나타내던 선수가 아니었기에 주목 받던 사람은 아니었던 겁니다.

황의조 선수는 이미 세계적인 선수인 손흥민을 제치고, 2018년 KFA(대한축구협회) ‘최우수 선수상’을 차지했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 황의조 선수의 엄청난 활약으로 축구 금메달 2연패를 달성하자, 그 전에 우려하고, 비난하던 사람들과 언론은 일제히 환호했습니다.

‘인맥축구, 논란거리도 아니었다’

‘벼랑 끝에서 인생역전’

‘인맥축구로 시작해 금맥으로 끝내…’

황의조 선수가 뛰고 있는 J리그 20개 팀 중에 하위권에 속한 ‘감바 오사카’는 1부 리그에서 강등 위기에 있는 팀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표팀의 김학범 감독이 그런 꼴찌 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를 선택하자 국내 축구팬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선택에 비난과 비판을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 감독의 선택으로 인해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축구계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한 선수의 인생은 지금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2:6절, 7절 말씀을 보시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죄인인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주목하심

제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선생님께서 여덟 살짜리 꼬맹이들의 산만한 모습을 보시면서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학교생활을 처음 해보는 제가 선생님의 그 말씀을 듣고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책상 아래에 손을 가지런히 한 상태로 ‘주먹’을 살짝 쥐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주목’이란 말을 태어나서 처음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게는 그 말씀이 ‘주먹을 쥐란 말’로 들렸습니다.

주목이란 말의 사전적인 뜻은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핌”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주목하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시면,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당시 세금징수원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경멸과 증오와 혐오를 받던 계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로마정부에서 정하고 있는 것만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바치면 될 것을 백성들에게 그 이상의 과도한 세금을 물리고, 나머지를 착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으니, 세례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3:12,13)” 그러니 당시 세리들이 공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는 일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세리들은 그렇게 부정한 재물을 축척하고, 물질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사회에서 그들은 ‘세리와 창기와 죄인’을 동급으로 여겼습니다.

성경에 보면 세금징수원인 세리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습니다. 백성들 중에는 굶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들은 늘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들도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도 크게 제약 없이 돈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종들을 부리며 크고 안락한 집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돈으로 다 되지는 않습니다. 분명 남들보다 더 넓은 집에서 살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고 싶은 것들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 수 없는 깊은 공허함이 몰려올 때가 많습니다. 또한 그 모든 부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리를 지날 때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경멸의 눈초리를 무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마태)가 세관에 앉아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시고 있는 장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리들을 바라볼 때 경멸의 눈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지금 세리 마태의 겉으로 보여 지는 풍요에 가려진 그 마음의 공허함과 죄책감과 외로움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주목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인생을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오셨을 겁니다. 남들은 다 공부할 때 일찍 사회에 뛰어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만 하는 환경 속에 있었을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남들보다 조금 많은 돈을 벌어보기도 하고, 조금 더 성공해 보기도 하고, 조금 더 인정받는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런 외적인 풍요가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기도 하고, 분명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뭔가 알 수 없는 외로움에 시달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1950~60년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배우인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는 그 모든 성공과 부와 영광과 인기를 뒤로 하고 자살로 생을 마친 여인입니다.

그녀가 죽기 전에 쓴 메모로 유명한 글을 언젠가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는데,

“난 여자로써 가질 것을 다 가졌습니다. 난 돈도 많고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나는 하루에 편지도 300통 이상 받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난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난 파장하여 문을 닫는 해수욕장과 같습니다.”

그는 수면제 50알을 먹고 자살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날마다 인생의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아직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습니다.

오늘 본문의 세리 마태와 같이 많은 것들 가졌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풍요는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하면 만족하겠지? 돈을 많이 벌면 만족하겠지? 남들보다 더 큰 집에 살고, 더 큰 차를 타고, 더 많은 인기를 누리면 만족하겠지? … 하며 어떻게든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버둥거리는 그 영혼을 오늘도 주님은 주목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나를 주목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2. 하나님의 부르심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찾아가셔서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도 그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경멸하고 혐오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5절 말씀을 보시면,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세리 마태는 예수님을 집에 초청한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며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은 유대교의 경건주의 학파이고,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의 산헤드린공회의 회원으로 그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건한 랍비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사람이 죄인들과 세리들을 가까이하고, 그들과 식탁교제하고 있는 모습은 당시 경건한 사람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은 절대 금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비유로서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라야 필요한 것처럼,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죄가 전혀 없고, 혼자서도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도 없고, 누군가의 도움도 필요 없다면… 그런 사람에게 주님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살아가면서 저지른 수많은 죄로 인해 마음이 괴롭고 답답하고 힘든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름대로 인생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내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고 주님의 도움이 너무 필요한 상황 앞에 서게 될 때 내게도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픈데 약을 먹여도 안 듣고,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마음이 괴롭기만 한 겁니다. 그 때 주님이 내 가정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잘 살고 싶었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되는 겁니다. 그 인간관계 때문에 다른 모든 게 힘들고 답답하고 어려울 때 그 역시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도 주님의 도움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 속에 마음이 가난해 짐을 느낍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만날 때, 비로소 심령이 가난해 지고, 그 가난해진 심령은 주님께 손을 내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입시에 실패했습니까?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가정에 실패했습니까?

인간관계에 실패했습니까?

교회생활에 실패했습니까?

인생에 실패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심령이 가난해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은혜를 담을 그릇이 준비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역사를 경험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잘나고,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나처럼 부족하고, 죄 많고, 실패했고, 무능하고, 연약하고, 미련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그런 나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세리 마태는 예수님께 부름 받아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를 통해 마태복음을 기록하게 하시고, 그 성경을 통해 오늘 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 많고, 실수 많고, 연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또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할 지라도, 우리를 주목하시고, 부르시고,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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