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21~35>
십여 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밀양』은 전도연 이라는 여배우를 세계적인 영화제인 ‘칸의 여왕(여우주연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서른세 살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 작은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들이 납치되었는데, 납치범은 큰돈을 요구했고, 주인공은 모든 돈을 털어 납치범에게 전달했지만 어린 아들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절망 속에 살던 이 여인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마음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면회를 가게 됩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살인범의 얼굴이 너무 좋아 보이고, 평안해 보이는 겁니다. 주인공은 용기를 내어 아들을 죽인 살인범에게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살인범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도 교도소에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셔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겁니다.
여인은 교도소에서 너무나도 큰 충격에 패닉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 이후 그녀는 “내가 용서를 안했는데 어떻게 먼저 용서할 수가 있어?”라고 하며 울부짖으며,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맞지만, 피해자의 마음이 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가해자는 용서를 구하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라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억울하게 만들고, 큰 손해를 보게 만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한 일이라면, 더더구나 그를 쉽게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고, 우리의 현실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문제를 갖고 우리는 평생을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용서의 문제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일마다 교회에서 만나야 하는 공동체 내에서 어쩌면 더 크게 대두되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21절, 22절 말씀을 보시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당시의 랍비들은 자신에게 죄 지은 사람을 3번까지는 용서해주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이어가시자, 베드로는 큰 맘 먹고 랍비들의 가르침보다 더 많은 7번까지 용서해주면 되겠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즉 490번까지라도 용서해 주라는 겁니다. 이것은 용서의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로써 설명해 주십니다. 어떤 임금이 그 종들과 결산을 할 때, 만 달란트를 빚진 자를 데려왔습니다. 1달란트라고 하면 34kg의 순금을 말하는데, 사람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인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1년에 800달란트에 해당됐는데, 1만 달란트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는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의 큰 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시면,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화가 난 임금은 그 종이 가진 것을 다 팔고, 가족들까지 종으로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이에 종이 임금 앞에 엎드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간청하니,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기 그 빚을 탕감해 줬다는 겁니다.
천문학적인 금액을 탕감 받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 이 종이 집에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노동자의 석 달 치 월급 정도)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서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 했고, 빚진 사람이 갚겠다 간청했지만 빚을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둬버립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동료들이 옥에 갇힌 동료를 불쌍히 생각해 이 사실을 임금에게 상소하게 되고, 임금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다시 잡아다 옥에 가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비유는 우리가 갚을 수 없는 큰 죄를 용서 받게 된 은혜를 입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형제의 작은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두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형제의 죄를 용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나도 용서 받기 어려운 죄를 용서 받은 큰 죄인이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