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생명의 말”

<사도행전 15:22~35> 

– Acts(45) –

 

 

스포츠를 보통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는데,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경기 하나를 꼽으라면, 펜싱 에페 종목에서 우리나라의 만 20세 박상영 선수와 세계 랭킹 3위인 헝가리 선수와의 결승전 경기일 겁니다.

이 선수가 2014년부터 우리나라 펜싱 유망주였는데, 2015년 운동선수로서는 사형선고와 같은 십자인대파열 부상을 입었었고, 1년간의 재활 훈련과 우여곡절 끝에 겨우 리우 올림픽 펜싱 국가대표로 참가하게 된 겁니다. 때문에 이 선수의 메달획득을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펜싱 에페 종목에서는 우리가 메달을 따 본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대는 이탈리아, 프랑스와 함께 전통적인 펜싱 강국 헝가리의 세계 랭킹 3위 백전노장의 노련한 선수였습니다.

2세트가 끝난 상황에 점수는 13:9로, 헝가리 선수는 2점만 내면 되고, 우리 선수는 6점을 따야했습니다. 또 노련한 헝가리 선수는 올림픽 첫 출전인 우리의 젊은 선수를 능숙하게 조련하듯이 경기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경험이 없었던 젊은 우리 선수에게 패색이 짙어갔습니다.

그리고 3세트가 시작되기 직전 카메라가 잠시 쉬고 있던 우리 선수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 했었는데, 그 때 관중석 어디선가에서 누군가가 한국말로 ‘할 수 있다’라는 말로 응원을 했고, 그 말에 우리 선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라는 말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잡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세트가 시작되었고, 두 선수는 1점씩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그래서 점수는 14:10이 되었는데, 우리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헝가리 선수는 결승전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노련하게 이끌어가고 있었고, 이제 1점만 따면 금메달이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우리 선수는 헝가리 선수에게 계속 끌려가고 있었고, 한 점도 내주지 말고 5점을 연속으로 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펜싱 에페 종목은 동시타가 가능한 경기라 동시에 서로 찌르면 둘 다 점수를 1점씩 얻는 경기였기 때문에 다섯 점이나 뒤지고 있었던 우리 선수가 1점을 딴다고 해도 경기는 바로 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고, 우리 선수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단 40초 동안 우리 박상영 선수가 연속으로 다섯 번의 찌르기를 성공해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역전극을 펼친 것이었습니다.

그 3세트가 시작되기 전 관중석을 뚫고 어디선가로 부터 들렸던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없었다면, 우리 선수가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라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않았다면 이런 드라마는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말에는 이런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말 하나로 낙심되어 있었던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부정적이고 힘 빠지게 하는 말 한마디로 어떤 이를 낙심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체가 없는 거 같지만, 우리의 말은 생명의 말이 되기도 하고, 죽음의 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1. 모든 파괴적인 말을 버리라

어떤 말은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세워주고 소망을 심어주는 생명의 말이지만, 어떤 말은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죽음의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입은 하나지만 우리의 입에서 모든 파괴적인 말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시리아의 안디옥교회는 다민족교회로서 놀랍게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회자인 바울과 바나바를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성공적으로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와 선교보고를 하고,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며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초대교회의 본산지와 같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인들이 와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을 수 있다(15:1절)’라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과 바울, 바나바 사이에 격렬한 다툼과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잘 성장하고 있었던 안디옥교회는 교리적인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세부에도 가끔 자기가 미국 시민권자라고 말하면서 사기를 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본문의 그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왔다고 하니깐 이방 땅에 있었던 안디옥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은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여러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 보내,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도들에게 논쟁이 되고 있는 그 교리적 문제를 명확하게 정리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24절 말씀을 보시면,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안디옥 교회에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말하는 이들에 대해서 사도들은 ‘그들을 보낸 적 없다’라고 단정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생활 잘 하고 있었던 안디옥의 이방인 성도들을 말로서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사도들은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라는 말의 헬라어를 직역하면 ‘너희의 혼을 파괴하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교리와 신학의 옳음을 주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거짓된 가르침을 통해 잘 성장해 가고 있었던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분열시키고, 흩어지게 하고, 신앙을 떠나게 만들고,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악한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잘 성장해 가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존재는 마귀입니다. 때문에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의 성장을 막고, 성도들을 분열시키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중단 시키려 시도합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악의적인 말’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라는 것과 같이, 말로서 성도들의 마음을 파괴하는 겁니다. 영적 분별력이라는 것은 그런 말들을 잘 분별해서 신앙의 성장을 막으려 하는 마귀의 계략을 알아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 성장해 감에 따라 교회 오셔서 믿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성경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 하는 성도들도 많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 성도들에게 접근해서 이상한 말을 하는 겁니다. 대체로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목회자에 대해서 험담을 하거나, 다른 성도들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들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에 대해서 점점 관심을 갖던 사람이 어떤 마음이 되겠어요?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과 신앙생활에 대해서 실망하는 겁니다. 순수한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와 목회자와 다른 성도들과 신앙생활에 점점 거리를 두게 되고, 어느 순간 교회를 떠나고 신앙생활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보시면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성경은 사탄 곧 마귀(δίαβολος)의 존재를 ‘참소하는 자(비방하는 자, 중상하는 자, 모함하는 자, 이간질하는 자, 시험하는 자, 거짓 고소하는 자, 분쟁을 일으키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방법들을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신앙을 파괴하는 일을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여러분들이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이 그 사람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이 말을 통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교회를 더 가까이하고, 성경을 더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내 말을 통해 이 사람의 마음이 상처를 입고, 신앙생활에 실망을 느끼고, 교회와 목회자를 멀리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겁니다. 만약 후자의 경우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면 그 사람은 마귀의 입술이 되어 ‘참소하는 자, 비방하는 자, 이간질하는 자, 시험하는 자, 분쟁을 일으키는 자’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뇌의 기능에 대해서는 보통 ‘지능’이라든가, ‘기억’에 관계된 것으로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뇌는 정서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 ‘감정의 뇌’라는 것이 있고, 지식과 판단과 기억의 기능을 갖고 있는 ‘이성의 뇌’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각 부분에서 감정적인 부분을 처리하거나, 이성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뇌의 기능들이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 『EBS 지식채널』에서 런던대학교, 워싱턴대학교,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들의 연구를 근거로 ‘부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말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짧은 실험영상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몇 초 동안 긍정단어, 부정단어, 욕, 일반단어 등 각각 3개씩 12개의 단어를 들려줍니다. 그 단어들은 ‘자유, 청춘, 이기다 / 퇴화하다, 잔인함, 우울 / O같다, O발, 지O하다 / 항만, 주변, 걸다’라는 말들입니다. 그리고는 ‘어떤 단어를 기억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실험 참가자가 “단어를 잘 기억하려고 하다가 욕이 나오는 순간 앞 단어가 잊혀졌다.”라고 말했습니다.

실험결과, ‘욕과 같은 부정적인 말은 일반적인 단어보다 4배나 강하게 기억되고, 분노와 공포 등을 느끼게 하는 감정의 뇌를 강하게 자극하게 되고, 이성의 뇌의 활동을 막아버린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감정의 뇌’라는 것이 ‘이성의 뇌’의 활동을 막아버리고, 감정이 뇌를 장악해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감정이 폭발하게 되면, 이성을 잃게 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버리는 겁니다. 감정의 뇌가 이성의 뇌의 활동을 막아버리고, 뇌를 장악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강한 욕설을 듣는 순간 이성의 뇌가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 때 뇌가 상처를 받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는데, 사람들이 ‘일반적인(평상적인) 말을 할 때’ 사람의 침에는 ‘무색의 침전물’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말’을 할 때는 ‘분홍색의 침전물’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화를 내며 욕을 할 때’는 ‘갈색의 침전물’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이 갈색의 침전물을 모아 실험쥐에게 주사를 했더니, 쥐는 곧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러니깐 부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말에 이런 호르몬 작용이 있는 것이고, 특히 욕과 같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말을 할 때는 ‘분노의 침전물’이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 말씀에 보시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성경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말의 힘)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 하나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야 겠습니까?

 

랍비 문학의 미드라쉬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 하는 자, 험담의 대상자, 듣는 자이다”

 

그런 말들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파괴적인 말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신앙에 시험을 줄 뿐만 아니라, 그 파괴는 나와 내 말을 듣는 사람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생명의 말로 모든 것을 살리라

말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파괴하기도 하지만, 말은 누군가를 살리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다시 세워주는 능력이 있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파괴적인 말을 버리고, 이제부터 생명의 말로 모든 것을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시면,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안디옥교회의 이 교리논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사도권을 공증해 줍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이 옳고,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 신앙생활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을 보시면,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바울과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다시 보내면서, 그 일을 증언해주고, 증명해 줄 유다와 실라 라는 예루살렘 교회 리더 두 명도 그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말이 안디옥 교회 내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의 권위를 확고히 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의 편지를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31절, 32절을 보시면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안디옥 교회를 분열하려고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영적인 혼란을 주고, 신앙을 흔들어 놓고,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분열의 위기를 가져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은 파괴적인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귀(δίαβολος) 곧 비방하는 자, 모함하는 자, 거짓 고소하는 자, 시험하는 자, 분열하게 하고, 파괴하고, 상처를 주는 마귀의 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유다와 실라는 안디옥에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믿음에 굳게 서도록 도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은 생명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말은 낙심해 있던 누군가를 위로하고, 소망을 주고, 다시 일어나게 하고, 믿음에 굳게 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토요일 새벽은 바이크선교회의 라이딩이 있는 날입니다. 저도 우리 남자 성도님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 라이딩을 나갑니다. 어제는 많이 못 오셔서 저를 포함해 세 사람이 부사이(Busay) 언덕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조식을 함께 했습니다. 식사 후에 차를 마시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최근 한국의 경기가 어렵고, 은퇴를 앞둔 분들도 은퇴 후에도 30년 이상 더 살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염려가 되고… 여러 가지 암울한 현실에 대해서 얘기가 오갔습니다.

하지만 그 대화는 어느새 세부 땅에서의 꿈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고, 지금 당장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당장 어떤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지만 저희 세 사람은 미래에 대한 큰 그림들을 그리고 소망 중에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리고 모임을 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가슴에 미래에 대한 커다란 청사진을 하나 들고 집에 돌아오는 거 같았습니다.

이런 게 말의 힘인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그런 말을 들으면 말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들까지도 어깨가 그냥 축 처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이 막막하고 아무 잡혀지는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으로 믿음의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소망 중에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자전거 타고 그 작은 식당 테이블에서 함께 나눴었던 그 얘기들이 3년 뒤, 5년 뒤, 10년 뒤… 언젠가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어느 날부터 세부에서도 유학생 집회인 코스타 같은 것이 열리면 좋겠다고 종종 말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우리 학생들 데리고 마닐라 코스타에 참석했습니다. 필리핀 전 섬에서 학생들이 다 왔는데, 그렇게 코스타가 많이 열렸었는데 세부에서 우리교회가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필리핀 코스타 본부에서 세부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코스타 실행팀과 스텝들이 모여서 올해 세부에서 ‘코스타 기도회’를 하자고 결정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엄청난 겁니다. 코스타 집회에 작년에 처음 우리 세부지역에서 참석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 던졌던 말들을 주님께서 듣고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올해 8월30일, 31일 이틀간 세부에서 코스타 기도회가 열리게 된 겁니다. 세미 코스타 같은 겁니다. 필리핀 코스타 역사 속에 마닐라 외에 북쪽으로는 바기오, 남쪽으로는 다바오에서 기도회가 열렸었는데, 세부에서는 처음으로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유학생들과 교민들을 사랑하셔서 이런 영적인 축복이 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말하면 그것이 곧 현실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반드시 현실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헬라어로 ‘말씀’을 ‘로고스(logos)’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로고스)’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4절에서 ‘생명’이라고 했고, 1장14절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시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생명의 로고스를 말하고, 그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것저것 다른 여러 가지 재료를 갖고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모든 것을 오직 말씀으로만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마치 아빠의 얼굴이 그 자식의 모습 속에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비슷한 무엇인가를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어떤 생명체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언어의 능력’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로고스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 로고스가 세상을 창조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말이 생명의 말이 되어 죽어있던 것들에 생명을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이 자녀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대로 여러분의 미래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이 또 다른 누군가를 살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생명의 로고스를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10장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세상의 아무리 많은 재물을 준다고 해도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로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말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말하든 그것은 여러분을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말은 생명의 로고스가 되고, 창조의 로고스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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