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성장 모멘텀(Momentum)”

<사도행전 16:1~5> 

– Acts(47) –

 

 

1904년,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력한 성령의 운동이 ‘웨일즈 부흥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1907년에는 조선 땅의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놀라운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평양 대부흥운동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 있어 웨일즈부흥 운동과 함께 가장 큰 성령의 부흥운동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큰 부흥운동이었습니다.

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대부흥의 현장에 있었던 ‘윌리엄 블레어(방위량, William Blair, 1876~1970)’선교사님과 ‘브루스 헌트(한부선, Bruce F. Hunt, 1903~1992)’선교사님은 그 때의 일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건물의 지붕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거대한 산사태처럼 우리에게 쏟아진 것 같았다.”

당시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성령의 부흥의 역사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통해 짐작해 볼 뿐입니다.

 

그런데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진원지인 장대현교회는 조선 땅에 온 최초의 선교사인 ‘로버트 J.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1866)’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7세의 토마스 선교사님은 여러 권의 성경을 들고, 미국상선인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물려 외국인들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고, 조선인들의 공격에 배는 불탔고, 토마스 선교사님은 성경책을 들고 강에 뛰어 내려 강변으로 올라왔습니다.

병사들은 토마스 선교사님을 둘러쌌고, 그 때 선교사님은 웃으면서 칼로 자신을 위협하던 박춘권이란 병사에게 성경을 건냈고, 또 12살의 최치량이란 소년에게 성경 3권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춘권은 토마스 선교사님을 칼로 참수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3권을 받은 소년 최치량은 그 성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시 평양의 관료였던 박영식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박영식은 그 성경을 뜯어 집에 벽지로 도배를 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최치량이 자라 박영식의 집을 구매하고, 그 집을 나그네들을 위한 여관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마펫 선교사와 그래함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와 그 여관에 머물게 되고, 최치량은 마펫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고, 그 집의 원 주인이었던 박영식도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고, 결국 그 집이 예배처소로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습니다.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은 널다리골 교회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참회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널다리골 교회가 성장하여 장대재 교회가 되었는데, 후에 성도들이 더욱 많아져 그 터 위에 1500명이 예배드릴 수 있었던 ‘장대현 교회’가 건축되었고, 1907년 이 교회에서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조선 땅에 와서 제대로 복음 한 번 전하지도 못한 채 박춘권의 칼에 참수를 당했지만, 그 순교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2: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세상적으로 평가한다면 토마스 선교사는 제대로 선교도 못한 실패한 사역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전한 성경과 그 안에 있는 살아있는 복음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토마스 선교사님은 한 알의 밀과 같이 땅에 떨어져 죽었지만, 그로 인해 우리 한국 땅의 위대한 부흥의 밀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애쓰고 수고했던 일들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앞에 좌절과 낙심의 날들을 경험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또는 사람들은 나를 실패자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큰 부흥이 준비되고 있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1. 뿌려진 씨들은 자라난다

뿌려진 씨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때문에 생명력이 있는 그 씨는 반드시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오늘 본문은 바울사도의 2차 선교여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차 선교여행 때는 바다를 가로질러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 루스드라를 거쳐 더베로 선교여행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리아 안디옥에서 육로로 이동해 1차 여행의 역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루스드라 지역에서 ‘디모데’라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고, 그의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고, 아버지는 헬라인이라는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비록 헬라인과 결혼했지만 그 어머니는 신실한 유대인이었던 거 같고, 디모데가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히 구약 성경을 가르쳤던 경건한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로부터 2~3년 전인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때, 디모데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사도 바울이 전한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 이심을 비로소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17~18세 쯤 되었었던 디모데도 그 믿음을 갖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를 믿고 그 후 2~3년 동안 디모데의 가정은 뜨겁게 믿음생활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을 보면,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까지 그들의 믿음은 ‘거짓이 없는 신실한 믿음’이었음을 바울 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4:17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귀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디모데전서 1:2절에서는 ‘믿음의 참 아들’이라고 표현했고, 디모데후서 1:2절에서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했고, 젊은 나이에 그는 목사직을 받고 바울 사도를 이어 에베소의 목사로 사역하게 됩니다(딤전4:14, 딤전1:3).

사도 바울과 동역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바울은 디모데를 특별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디모데 역시 줄곧 바울 곁을 지키며 바울의 수행자요, 제자요, 스텝으로 함께 선교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와 함께 옥에 갇히기도 했었습니다.

 

빌립보서 2:20~22절을 보면,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면서 이렇게까지 말하며 그를 추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보면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헌신된 성도 하나를 보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보람 있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목회가 힘들고 어려운 길이지만, 그렇게 변화된 성도 한 사람으로 인해 목회 사역에 있어 큰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교회 일이라면 언제든지 ‘예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신실하고 헌신된 제자 하나로 인해 울고 웃는 게 목회자인 거 같습니다.

이런 신실한 제자 디모데가 ‘루스드라’에 있었던 겁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크게 칭찬 듣던 자라고 2절에서도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2~3년 사이에 디모데는 신앙적으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그것은 주변 마을사람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있었던 루스드라 그리고 이고니온이란 지역이 바울에겐 어떤 곳이었습니까? 우리가 사도행전 14장 말씀을 이미 나눴지만, 바울 일행은 이고니온에서 많은 사람을 전도했지만, 그곳 사람들이 시기해서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해서, 바울은 루스드라로 피해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선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장애인을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온 마을 사람들은 바나바를 그들의 신인 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라 말하며 그들 앞에 소를 끌고 와 제사하려 했었습니다. 바울이 겨우 말려 그 일을 못하게 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고니온에서부터 와서 루스드라 마을 사람들을 충동해서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은 돌들에 맞아 쓰러져 숨이 끊어진 사람처럼 되어 버렸고, 그들은 바울을 성 밖에 내다 버렸었습니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사람처럼 되었던 바울은 겨우 다시 일어나 ‘더베’라는 지역으로 피신하듯 이동했었습니다.

과거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을 한 사람은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성인이 되어서도 물에 대한 공포로 물에 안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한 번 상처 입은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간관계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 걸 많이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멀리하기도 하고, 작은 일에 상처 받기도 하는 겁니다.

어디나 이민생활이 삭막한 경우가 많겠지만 세부에서 사람들에게 상처 받은 사람은 다시는 세부에는 안 돌아온다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필리핀 쪽으로는 얼굴도 안 돌린다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상처가 그만큼 깊은 겁니다.

바울 사도라고 안 그러겠습니까? 그냥 상처 정도가 안라 이를 갈며 악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 곳입니다. 어쩌면 돌에 맞아 일시적인 쇼크로 진짜 잠시 숨이 끊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루스드라에 ‘디모데’라고 하는, 바울이 평생 동안 함께 동역할 신실한 제자가 세워졌었던 것입니다. 사실 영적으로 무기력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백 명, 천 명보다 신실한 한 사람의 제자가 더 큰 일들을 해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도 3년 6개월 동안 공생애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군중들이 그를 따랐지만 예수님은 12명의 제자훈련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나마 그 중 하나인 가룟 유다한테는 배신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이 결국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어, 세상을 변혁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뿌린 씨들은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힘들게 힘들게 준비한 일들이 헛수고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결실도 맺을 수 없을 거 같고,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 재정 낭비, 내 인생만 낭비한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뿌린 씨들은 반드시 자라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싹 조차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땅 속 어디에선가 그 씨는 싹 틔울 준비를 하고 있고, 어쩌면 이제 막 단단한 땅을 뚫고 싹의 머리를 내밀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싹은 자라나고 반드시 결실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꿈꾸던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9절 말씀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포기하지 마십시오. 뿌려진 씨는 우리가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뿌려진 씨는 자라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거두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견뎌내는 사람이, 버티는 사람이 결국 마지막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인격과 신앙에서 자란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뿌린 씨들이 모두 다 잘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4가지 밭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처럼, 어떤 씨들은 길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돌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지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 씨들은 잘 자라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큽니다.

하지만 어떤 씨들은 좋은 밭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 좋은 밭에 떨어진 씨들은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 전에 손해 본 것들을 다 만회하고, 그 전에 실망하고 낙심되었던 마음들을 다 상쇄할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전도서 11:6절 말씀을 보시면,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예수님께서도 12명의 제자를 양육했었지만 그들 모두가 다 훌륭한 제자의 삶을 산 건 아닙니다. 그 중에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도 나왔었던 겁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람들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라 할지라도 완벽할 수는 없는 겁니다. 분명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또 모든 성도들이 다 변화되고, 다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전도서 말씀과 같이 아침에도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고 부지런히 사역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잘 될지, 저것이 잘될지 혹은 둘 다 모두 잘 될는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부에서 손대는 것마다 다 잘되지는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패할까봐 두려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루스드라에 씨를 뿌렸지만 그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변화 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디모데와 같은 훌륭한 제자가 나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시면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그런데 이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디모데가 얼마나 귀한 인물이었겠습니까?

학자들은 이 때 디모데의 나이가 21세 쯤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다고 할 수 있는 그 나이에 디모데는 그 두 지역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너무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단지 교회생활만 열심히 하고, 기도만 열심히 하고, 봉사만 열심히 한다고 이런 평가가 뒤 따르겠습니까?

아무리 교회 활동과 봉사를 열심히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경 지식이 많다고 할지라도 인격적인 부분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의 위선적인 태도 때문에 오히려 더 욕을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앙성숙은 인격의 성숙과 항상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성숙함이 따라주지 않는 신앙은 아직 온전한 영적 성숙이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17세기의 청교도 ‘토마스 아담스(Thomas Adams, 1612~1653)’는

“선행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악행은 믿음을 철저하게 약화시킨다”

 

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착해야 하는 겁니다. 친절해야 합니다. 온유해야 합니다. 자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토마스 아담스의 말과 같이 선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의 믿음이 인격의 변화와 함께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그는 아직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행이란 것은 우리의 믿음을 점점 약화시키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1:24절 말씀을 보시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울과 1차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사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성령과 믿음의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깐 신앙과 인격이 훌륭했던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만 충만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신앙과 인격이 훌륭하니 큰 무리가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 디모데로 인해서 바울 사도의 전도여행에는 큰 은혜가 임했던 것입니다. 여러 교회들이 더 굳건해질 뿐만 아니라, 그 수가 날마다 더 늘어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모멘텀(momentum)’이란 말이 있는데, 추진력이나 운동량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경제학에서 가져와 경제용어로 ‘성장 모멘텀’이라고 종종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경제가 성장해 나갈 때 그 추진력이 있어야 제대로 건강하게 잘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잘 성장해 나가는데 있어서의 성장 모멘텀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에 인격의 성숙함이 있을 때 그것이 곧 성장 모멘텀이 되어 교회는 잘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나바의 경우도 그러했고, 오늘 본문의 디모데를 볼 때도 그 원리는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을 봅니다.

한 사람의 신앙도 인격과 함께 성숙해 가야 그가 온전한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고, 그 성숙한 한 사람으로 인해 가정이 변화되고, 또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교회가 은혜로워 지고, 세상에 변화가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성장의 모멘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믿음이 성장하고, 그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개인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이 성장의 모멘텀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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