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1~18>
– 40일 특별새벽기도회(1) –
‘청소년 월드컵’이라 할 수 있는 『FIFA U-20 World Cup in Poland 2019』이 지난 6월 16일에 끝났습니다. 우리는 이 대회에서 아쉽게 져서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우리 축구 역사 사상 최초로 월드컵 결승까지 진출했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이번 대회를 현장 취재했었던 기자생활 17년차의 MBC 정규묵 기자라는 분이 월드컵 취재를 하며 있었던 일을 회고하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처음 우리 대표팀이 소집되었을 때, 우리 팀이 16강에 진출하는 것도 낙관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조별리그에서 싸워야 할 팀들이 축구 강호 포르투갈을 비롯해 여섯 번이나 우승했던 아르헨티나 그리고 남아공. 그 누구하나 만만한 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4월 대표팀이 소집되고 기자들이 우리 선수들 인터뷰를 하는데, 이번 대회를 치르는 각오라든가, 목표 같은 것을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하나같이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대답하더라는 겁니다.
기자들은 선수들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조별리그 3경기를 2승 이상해야 16강에 올라갈 수 있는데, 거기까지만 올라가도 정말 잘 싸웠다고, 큰 쾌거를 이뤘다고 할 만한 성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표가 ‘우승’이라고 하니깐 그때 대부분의 우리나라 기자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무 심한 거 아냐? 어떻게 우리가 우승을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결승까지 설마 가겠어?”
라고 했다는 겁니다. 10년, 20년 스포츠 뉴스만 전하던 기자들조차 우리 어린 선수들의 말을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선수들에겐 허황된 꿈이 아니었던 겁니다. 비록 우승의 목표는 못 이뤘지만, 우리 축구 역사상 최초로 FIFA주간 세계대회에서 준우승에 오른 것입니다.
‘천지창조’를 그리고 ‘다윗상’을 조각한 16세기 이탈리아의 천재적 예술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 B. Simoni, 1475~1564)’가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일은 목표를 너무 높게 잡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너무 낮게 잡고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큰 꿈을 갖고, 큰 비전을 목표로 나아가다가 거기 이르지 못하는 것보다 목표를 너무 낮게 잡고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더 위험한 것이라는 겁니다. 만약 우리 축구대표팀의 어린 선수들이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지 않았다면, 이번 대회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이런 결과는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 꿈을 갖고 그 비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리다가 그 꿈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20세기 천재 물리학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의 격차보다 무서운 것은 꿈의 격차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라 할지라도 그것을 꿈꾸고 상상하는 순간 이미 거기에 다가가 있는 셈이다.”
꿈과 상상이 없는 사람은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장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없을지라도 날마다 믿음으로 꿈꾸고 상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81편 10절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입을 크게 열 때 더 많이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말씀과 같이 믿음으로 입을 크게 여는 이들에게 채워주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2019년 상반기 6개월의 마지막 날이 오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부터 하반기(후반전) 6개월을 시작합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여러 가지 계획하고 실행했던 일들이 여러분의 생각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겐 낙심된 마음이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제 하반기 6개월을 새롭게 시작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갑절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지난 6개월과는 비교되지 않을 놀랍고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줄 믿습니다.
1. 저항을 넘어라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엘리사’라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그의 스승이었으며,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인 ‘엘리야’에 대해서 잠시 살펴봐야 합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로,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 왕(B.C. 876~854)’과 그의 아들 ‘아하시야 왕’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 라고 하는 우상 숭배에 온 맘을 기울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선지자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박해했었고 반대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는 왕궁에서 월급을 주고, 매일 왕과 왕비와 함께 식탁에 앉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영적으로 타락했던 시대에 엘리야가 활동했었습니다.
엘리야 하면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갈멜산에서의 영적 전투가 떠오르실 겁니다. 엘리야는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하여 이 영적 전투에서 승리했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그 땅에서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재앙이 임하기도 했고, 다시 엘리야는 닫혔던 하늘의 문을 열어 기근이 끝나게도 했던 수많은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일으켰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회오리 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갔는데, 죽지 않고 승천한 유일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엘리야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가장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 앞에 불꽃처럼 쓰임 받다가 죽지 않고 승천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는 엘리사라는 제자가 있었고, 엘리야의 승천이 점점 가까워 오는데 엘리야와 엘리사는 함께 ‘길갈’이라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시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벧엘로 이끄시고 있었고,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신은 이제 벧엘로 가야 하니 너는 길갈에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어떻게 해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며, 스승인 엘리야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킵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야와 함께 벧엘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있었던 엘리사의 동료들인 선지자의 제자들(신학생들)이 ‘엘리사, 지금 스승님이 승천을 앞둔 이 중요한 시점에 왜 자꾸 선생님 신경 쓰이게 따라다니는가? 이 사실을 안다면 좀 자제 좀 하시지?’ 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는 자신도 그 사실을 아니깐 그만 얘기하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4절에 보니깐 엘리야 선지자도 엘리사에게 자신은 이제 여리고로, 요단으로 가야하는데 여기 머물라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2절에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딱 붙어 있는 겁니다. 여리고에서도 다른 선지자의 제자들이 역시 엘리사에게 같은 충고를 하지만, 엘리사는 그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또 엘리야도 다시 한 번 엘리사에게 여리고에 머물러 있으라 하지만 엘리사는 스승에게 동일하게 대답하며 그를 붙좇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엘리사는 이런 영적 욕심과 열심과 끈기로 결국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영적 후계자가 되어, 위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습니까? 길갈에서, 벧엘에서 그리고 여리고에서 스승님도, 동료들도 계속 엘리사를 막아섰습니다. 다섯 번에 걸친 저항과 장애물이 엘리사 앞에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자신이 꿈꾸고 소망하는 그 일 앞에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왜 저항이 없겠습니까? 어떤 장애물도 없고, 어떤 시련도 없이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꿈이 크면 클수록, 여러분에게 주신 비전이 크면 클수록 장애물도, 저항의 크기도 비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저항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장애물을 넘어야 그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26편 5절, 6절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의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려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아무런 저항도, 장애물도 없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흘린 그 눈물이 변하여 기쁨과 찬송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저항을 넘으십시오.
2. 운명을 바꿔라
‘운명(運命)’이란 말은
“어떤 법칙 또는 힘에 의해 목숨이나 미래가 결정된 상태.”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운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런 운명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난하도록 운명이 결정된 사람은 결코 그 가난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실패하도록 운명이 결정된 사람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반대로 천운을 타고 나서 성공하도록 운명이 정해진 사람은 성공하는 건가요?
그런데 본문 7절 보시면,
“선지자의 제자 오십 명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제자는 엘리사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벧엘에서도, 여리고에서도 제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 외에도 많은 선지생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 보니깐 엘리야와 그 제자 엘리사가 요단 강가에 서 있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50명의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사와 그들 50명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구경만 하고 있는 거고, 엘리사는 지금 엘리야 옆에 딱 붙어서 새로운 역사의 주역이 되고 있는 겁니다.
8절을 보시면,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스승인 엘리야 선지자가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치니깐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야와 그 제자 엘리사는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경만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그냥 멍청하게 서서 다른 사람이 하는 것만 구경하고 있는 겁니다. 강물을 가르고 그 가운데 마른 땅을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기적의 한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 모든 운명과 같이 바뀌지 않을 거 같은 운명을 거스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운명을 바꾸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것들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지 마십시오.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것을 새로운 역사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장애를 앉고 태어나 평생 그 장애 속에서 낙심과 절망과 열등감을 앉고 사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닉 부이치치’ 같은 사람은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지만, 전 세계를 다니며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을 물려받았다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나쁘다고, 어떤 사람은 좋은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고, 어떤 사람은 재능이 없다고, 어떤 사람은 매력이 없다고, 어떤 사람은 외모가 부족하다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 약하다고, 어떤 사람은 환경이 안 좋다고… 그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렇게 그 슬픔과 절망 속에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운명을 바꾸시겠습니까?
9절 말씀 보세요.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엘리사는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던 50명의 다른 선지생도들과는 달랐습니다. 엘리사의 끈기와 열심과 열정을 보고, 선지자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늘로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합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뭐라 합니까?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장자들은 그 가문의 후계자였고, 그들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배(갑절)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지금 엘리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엘리야 선지자의 영적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는 소원인 것입니다.
그는 짧은 인생,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엘리야 선지자처럼 불꽃같이 쓰임 받다 가길 원했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영적 후계자가 되어 그 어둡고 부패한 시대에 빛이 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갑절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엘리사도 멀리 서서 구경하던 그 50명 중에 한 명이 될 뻔했습니다. 많은 운명론자들처럼 그냥 그것에 순응하며 어떤 역사도 이루지 않고 살 뻔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런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런 운명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운명을 바꾸길 원했습니다.
지난 6개월은 우리가 실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6개월은 여러분을 짓누르는 그 운명론을 거부하십시오. 이제 믿음으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시길 바랍니다. 엘리사처럼 지난 6개월과 비교되지 않는 갑절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냥 멀리서 다른 사람의 기적과 같은 일들을 부러워만 마시고, 여러분이 그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기계발서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잘 아실 겁니다. 이 책을 지은 ‘데일 카네기(Dale B. Carnegie, 1888~1955)’가 운명에 대해서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진리를 말합니다.
“운명이 레몬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레몬주스를 만들려고 노력하라!”
멀리서 요단 강가에 서 있는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만 바라보고 있었던 선지생도들은 운명을 바꿀 수 없었지만, 엘리사는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운명을 바꾼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바꿀 수 없지만, 믿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은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3. 끝까지 견뎌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무엇이든 한 순간에 이뤄지는 것은 없습니다.
– 아침에 씨를 뿌렸는데 저녁에 그 열매를 거두는 일은 없습니다.
– 학생들이 오늘 하루 공부했는데 바로 성적이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 오늘 1시간 땀 흘리면서 운동했다고 뱃살이 쏙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 세부에 큰 기대를 안고 목돈을 들여 가게를 하나 오픈했다고 첫날부터 매출 대박행진을 이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 아무리 주님의 교회를 이 땅에 개척했다고 해서 갑자기 수백 명이 몰려들고, 교회 건물도 짓고, 모든 비전이 한 순간에 다 이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질서, 우주의 질서에서 어긋납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심을 때가 있고 추수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농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뭐겠습니까? ‘인내’인 것입니다. 필리핀에 많은 망고나무도 수령이 10년이 될 때까지는 제대로 된 망고 열매를 잘 맺지 못합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면 비로소 망고들이 열리기 시작하는데, 20년, 30년 수령이 늘면 늘어날수록 그 달고 맛있는 망고는 수백 개에서 수천 개까지 수확량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망고나무 심고 7~8년 지났는데, 망고가 안 열린다고 그거 베어 버리고 거기에 1년 내에 잘 자라는 바나나를 심으면 바나나 열매는 좀 얻을지 몰라도 그런 사람은 평생 부가가치가 더 높은 망고 열매는 못 따는 겁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에게 갑절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야 선지자는 그건 어려운 일을 구한다 했습니다. 하지만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가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까지 스승인 엘리야를 떠나지 않고 따랐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다 왔는데 만약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보지 못한다면 그 꿈, 그 비전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견디면 그 갑절의 은혜는 엘리사에게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오늘의 본문을 보면 엘리야가 승천하면서 엘리사에게 그 능력과 사역이 계승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5월에 세부에서 필리핀한인교회협의회 목회자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세미나 중간에 필리핀에서 십여 년, 이십여 년 사역하신 목사님들의 간증들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목사님들이 많았고, 그 분들의 사역들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해서 이곳에서 6년 여 사역하면서 중간에 힘들고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께는 그런 일들이 없었겠습니까? 정말 깊은 어둠의 터널에 갇혀 고통과 눈물의 시간들을 지나 오늘의 영광과 은혜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시간들, 그 세월들, 그 시련의 날들을 견뎌내셨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뎌냈더니 오늘 그 놀랍고 영광스러운 은혜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6개월 잘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또 다른 6개월을 지낼 것입니다. 힘든 일들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세부 생활하면서 순간순간 이 땅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견뎌내십시오. 끝까지 견디십시오. 견디는 사람이 열매도 거두는 것입니다. 인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탈레랑)은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군사 지도자였던 ‘나폴레옹’을 “1천 년 내 가장 비범한 생애를 산 가장 놀라운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최후의 승리는 인내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인내하는 데서 운명이 좌우되고 성공이 따르게 된다”
코르시카 출신의 하급 귀족으로 시작해 한 때 세상을 지배했고, 프랑스의 최초의 황제가 된 사람에게도 인내는 성공의 비법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견디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그가 좋은 마음의 밭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 밭이 좋은 사람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일부터 40일 특별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하반기 6개월을 승리하기 위해, 먼저 40일을 승리하십시오. 40일을 승리하는 사람이 나머지 6개월도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