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주가 일하심을 믿으라”

<창세기 20:1~18> 

– 40일 특새 : 갑절의 은혜를 구하라(37) –

 

 

우리가 ‘배수의 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중국의 고전 『초한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자성어로 ‘등 배(背)’자에 ‘물 수(水)’자를 써서 ‘배수지진(背水之陣 : 물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나라의 명장 한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위(魏)나라를 쳐부수고 돌아왔는데, 왕은 한신과 지쳐있는 2만명의 병사들에게 조(趙)나라를 치라 명합니다. 하지만 조나라에서는 이미 눈치를 채고 2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산 위에 성채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폈습니다. 한신은 2천명의 기병을 조나라의 성채 바로 뒷산에 매복을 시키고, 1만명의 병사를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 하고,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성채를 향해 나아갑니다.

날이 밟자 한나라가 먼저 북을 울리며 진격을 명했고, 조나라 군사는 성채에서 쏟아져 나오면서 한신이 이끄는 한나라 군사와 싸우게 됩니다. 어느 정도 싸우다가 한신이 이끄는 군사는 거짓으로 퇴각하면서 강가에 진을 친 부대에 합류하게 되고, 그 모습을 본 조나라 쪽에서는 ‘저들은 기본적인 병법조차 모른다. 저들은 독안에 든 쥐와 같다.’라고 하면서 총공세를 펼칩니다. 성채에는 최소의 경비병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매복해 있었던 한신의 2천 기병대는 손쉽게 조나라의 성채를 정복하고 깃발을 꽂게 됩니다. 강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친 한신의 군사들은 도망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가다가 강에 빠져 죽든, 10배나 넘는 조나라 군사와 싸우다 죽든 죽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됩니다. 조나라 군사들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 군사에 패하여 성채로 돌아 가보니 이미 성채는 한나라 깃발이 꽂혀 있었던 것입니다.

한신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2만명으로 10만명과 싸워 이긴 것입니다. 전승축하연에서 부하 장수들이 한신에게 왜 기본병법에서 벗어난 ‘배수의 진’을 쳤는지를 묻자 한신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군사는 이번에 급히 편성한 오합지졸이 아닌가? 이런 군사는 사지(死地)에 두어야만 필사적으로 싸우는 법이야. 그래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것[背水之陣]’이네.”

‘배수의 진’ 즉 ‘죽기를 각오하고 한다면 불가능이 없다’는 의미의 말인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큰 도전 앞에서 안 될 가능성, 실패할 가능성에 대해서 염두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피할 곳, 도망 갈 곳, 살 구멍을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라는 안일한 자세인 것입니다. ‘나는 이게 아니면 안 된다’라는 절박한 마음이 있어야 거기에 모든 걸 걸고, 최선을 다하고, 배수의 진과 같이 죽기를 각오하고 거기에 모든 걸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불가능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맞닥뜨리면 그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17장 이후부터는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천사들이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1년 뒤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약의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그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0장은 아브라함이 헤브론 지역을 떠나서 ‘그랄’이라고 하는 지역으로 옮겨가 거류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2절을 보시면,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와 똑같은 사건이 다시 반복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랄 지역에 내려가 거류할 때,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랄 왕 아비멜렉은 신하를 보내서 사라를 후궁으로 삼으려고 데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또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소개했나요? 11절에 보니깐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자신의 아내를 뺏으려고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죽으면 사라는 누구를 통해서 아들을 낳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1년 뒤에 아들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언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브라함이 죽으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고, 사라는 그랄 왕 아비멜렉의 후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변함없이 확실하다면 아브라함은 절대 안 죽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아이를 안겨줄 때까지 절대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는 그랄 왕 아비멜렉의 꿈속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사라를 후처로 삼으려는 시도를 중단하게 만듭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처 사라를 돌려보내고, 그의 가정을 후대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리고 17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아비멜렉도 후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기도해 주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셔서 그들이 임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브라함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자기는 정작 아직 아기가 없는데, 자기가 기도해 준 아비멜렉의 가정에 임신과 출산의 축복이 임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 때문에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 라는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비멜렉 사건을 통해 결국 ‘주가 일하실 것이다’라는 믿음,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믿음을 다시 확고하게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게 될 때, ‘이거 안 되면 말고…’라는 식의 어정쩡한 믿음은 기적을 만들 수 없습니다. 배수의 진과 같이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바라보거나 어떤 대안을 생각해 두기보다는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인 ‘데이빗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은 “사명자는 사명을 다할 때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내 눈 앞의 현실 때문에 너무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룰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부족해도, 주께서 나를 위해 일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Add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