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8~21>
– 40일 특새 : 갑절의 은혜를 구하라(39) –
이 땅의 교회는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어서 누구나 교회에 등록만하면 그 교회 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두 번 봐서는 잘 모릅니다. 6개월이든, 1년이든 겪어봐야 그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 교인들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아서도 안 되고, 판단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그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간혹 다른 목적을 갖고 교회에 오는 사람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있기도 하고, 양과 염소가 섞여있기도 합니다.
필리핀에서 이민교회를 하다 보니 여느 이민사회가 다 그렇겠지만 이곳은 어디에서 월급 받으면서 일할 때가 그리 많지 않으니 더더욱 비즈니스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제가 개척 초기부터 ‘우리 교회는 교회 내 성도들 간의 돈 거래나 성도들 간의 동업이나, 비즈니스를 허용하지 않습니다.’라고 수차례 말해뒀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이 운영하는 가게나 생업이 있다면 적극 이용해줘야 하고, 좀 비싸더라도, 좀 맛이 없어도 되도록 우리 성도들 거 팔아주라고 제가 적극 독려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한 가족이라면 가족들 업체를 도와주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비즈니스가 목적이 되고, 비즈니스를 위해 교회를 온 사람들은 담임목사의 말이 탐탁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제가 그런 부분에 재재를 하니깐, 어떤 지나간 교인 중에 하나는 ‘그럼 이민사회에서 교인들끼리 비즈니스를 안 하면 누구랑 합니까!’라고 따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개척 초기에 다른 목적을 갖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 때문에 교회 내에 큰 혼란과 다툼이 있었고, 저는 그 일을 중재하려다 미움만 받고, 막 개척된 교회는 전도하고 부흥하기도 바쁜 시기에 엉뚱한 일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고 어수선했습니다. 큰 기대와 꿈을 갖고 시작된 교회 개척 사역에 발목이 잡힌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 달려가려고 하는데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이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분에게 은혜를 주시기 시작합니다. 찬양 중에, 기도 중에 그리고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감동이 되고 눈물도 나고 그러는 겁니다. 그렇게 믿음이 잘 자라면 좋겠는데, 이 분이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그 믿음이 계속 잘 성장해 나가려면 이전에 세상에서 갖고 있었던 옛 습관과 생활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술과 담배와 같은 것이 구원 받고 안 받고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은혜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고, 믿음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분이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과 더 친밀해 지는 것에는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9절을 보시면,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젖을 땐 이삭의 나이가 2~3살 되었을 거고,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16~17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본처의 자식은 이삭이고, 첩의 자식은 이스마엘인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배다른 동생 이삭이 미웠습니다. 그래서 심하게 괴롭혔던 겁니다. 그 모습을 보던 사라가 식겁해서 ‘저러다 이스마엘이 내 아들 이삭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겁이 덜컥 났었던 것입니다.
10절을 보시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가서 여종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아줄 것을 말합니다. 종의 아들은 이삭과 함께 기업을 함께 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아들인지라 그 일이 심히 근심이 되었는데, 12절에 보니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대로 여종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그도 아브라함의 자식이기 때문에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들을 내보내게 되었다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갈라디아서 말씀과 비교하면서 보셔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니깐 이 사건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본처와 후처 사이, 배다른 형제들 간의 유산 상속에 관한 다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9절 말씀을 보시면,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여기서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을 말하고, ‘성령을 따라 난 자’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사라를 통해 나은 아들 이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는 이런 대립관계가 형성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7절을 보시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이 커지면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이 커지만 육체를 거스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이 둘 사이의 싸움이 치열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10년 했고, 20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떤 신앙생활을 했느냐? 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모태신앙이라 할 지라도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고, 옛 습관과 삶을 포기하지 않고 육체의 즐거움만을 따르는 생활을 했다면 제대로 1년 신앙생활 한 사람보다 더 믿음이 약할 수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숨만 쉬고 산 사람하고, 1년 동안 매일 피트니스에 가서 운동한 사람하고 누가 근육이 더 많겠습니까?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주일날만 교회에 왔다 갔다 한 사람보다 새벽기도 매일 1년 동안 한 사람의 영적 근력이 더 좋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시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영적 근육이 있어야 마귀와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십시오.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삶은 내 믿음을 깍아 먹는 겁니다. 내 믿음을 후퇴시키는 것입니다. 더 거룩해지기를 결단하십시오. 더 주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