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1~5>
– 40일 특새 : 갑절의 은혜를 구하라(41) –
우리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알고 있는 ‘예루살렘(Jerusalem)’은 신구약시대까지는 수도였지만 지금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수도는 ‘텔아비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불가능합니다.
예루살렘은 BC586년 남유다 왕국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 성전과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 의해 BC516년 성전은 재건되게 됩니다.
그러나 BC63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훼파되었고,
로마 제국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세워진 헤롯 왕은 에돔 사람으로 유대 혈통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BC19~AD63년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보수하고 중건하게 됩니다.
하지만 7년 뒤인 AD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유다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했고, 성전도 함께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티투스 장군은 유대인들을 조롱하듯이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담장 하나만 남겨두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 날의 ‘통곡의 벽’인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그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아예 없애 버리고, 유다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됩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지만, 그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통곡의 벽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서쪽 지역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통곡의 벽 건너편부터는 요르단 지역이고,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곳에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세워져 있고, 그들은 그곳이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믿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37~38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서쪽 벽 즉 ‘통곡의 벽’에서 통곡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의 조상들과 그들이 좀 더 일찍 순종했다면 그들의 나라는 과거 멸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저렇게 예루살렘 성전터를 빼앗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와서 후회하고 통곡한다고 해서 이것이 되돌려지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때문에 순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실 때 그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거나, 어떤 규범에 우리를 가두어 두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시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삭이 젖을 뗄 때, 이스마엘과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가게 됩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우리를 테스트(test)하시는 것입니다.
테스트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레벨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느 정도 믿음을 갖고 있는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브라함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같은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음 단계로의 진입을 위해 테스트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앞에 어떤 테스트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과해야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걸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는 믿음의 넥스트 레벨은 영영히 가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십여 년 전에 장성했던 이스마엘을 내보낸 후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 위에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려랴’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상식적이지도 않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시기도 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이건 아닐 거야. 말도 안돼. 그럴 수 없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3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즉시 순종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21장 14절에서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에도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그것을 고민하거나, 계산하거나, 시간을 끌면 순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진짜 믿음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끌지 않습니다.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라고 믿고, 그냥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다른 이유를 달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즉시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순종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믿는다면 오래 지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번제로 바치면 그 아들이 죽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면서 함께 동행 했던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삭과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릴 마음이 없었던 건가요?
이것을 히브리서 11장 19절에서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했으니깐 바치는 것이고, 만약 이삭이 죽는다 할지라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릴 것이라는 부활의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시 순종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순종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주시는 감동을 소멸하지 말고, 즉시 순종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