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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고 잘 사는 길”

<사도행전 18:18~28>

– Acts(52) –

 

 

엊그제 새로운 법무장관후보의 인사청문회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던 거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의혹들이 많아 국민모두가 이번 청문회에서 그런 의혹들이 해소되기를 바랐지만, 질문하는 여야의원들의 질의도 그것에 대해 시원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후보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답답한 마음만 더해졌다는 평가입니다.

 

 

매년 12월이면 대학교수들이 그 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는데, 2015년 전국의 880명의 대학교수들에게 그해의 사자성어를 물었습니다. 교수들이 뽑은 2015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라는 말이 뽑혔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라의 예법과 도의가 무너진 상태’를 말하는 ‘천하무도(天下無道)’라는 말과 ‘무능한 정치 지도자’를 뜻하는 ‘혼군과 용군’ 즉 ‘혼용’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사자성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2014년에는 세월호 침몰사건이 있었는데, 정부와 관련 기관의 장들이 300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이 물속에 수장되고 있는데 제때 구조하지 못했었고, 2015년에는 메르스라는 전염병이 온 나라 안에 돌 때 정부가 안이하게 대처함으로 정치적 무능함을 보인 것을 꼬집는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16년에 화가 난 국민들은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끄집어 내리는 우리 정치사에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런 사자성어들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이것이 단지 우리나라 정치사에만 있는 일은 아니고, 역사 속에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권력자든지 그 주변에는 간신과 충신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성대통령이며, 아버지에 이어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된 유래는 현대정치 역사상 흔치 않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권력자의 실수는 주변에 간신들을 가까이 두고, 충신들을 멀리했던 것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간신을 멀리하고, 충신을 가까이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지도자는 자기 입맛을 맞춰주기 바쁜 간신을 가까이 두나 그로 인해 그의 수명은 짧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뿐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의 인생 역시 잘 되고 잘 사는 길이 있습니다.

 

1. 항상 겸손하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 되고 잘 살아가는데 필요한 첫 번째 원칙은 ‘항상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하늘 높이 올라 날던 비행기가 추락하면 그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의 생존 가능성은 낮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데 마음을 두고 살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충격과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낮은데 마음을 두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은 떨어질 일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잘 되고 잘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요소는 항상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크게 성공했고, 잘 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원칙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자신이 전도했던 지역들을 역으로 방문하면서 파송교회였던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 외에 ‘아볼로(Apollos)’라는 사람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Priscilla and Aquila)’라는 부부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의 초점은 바울이 아니라 이 세 사람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먼저, ‘브리스길라’라는 여인은 로마귀족 출신 여성이었고, ‘아굴라’는 터키 지방에 살던 유대인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는 유대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는데, 로마의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려서 그리스의 고린도지역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바울 사도를 만나게 되었고, 바울과 함께 천막 만들어 파는 일을 했었고,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은 그들은 자기 집을 내주어 예배처소를 삼았고, 바울의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정리하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에베소 지역을 재방문했는데, 그곳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머물게 하고,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새로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돌보도록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라는 사람은 로마제국의 제2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의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세워진 대도시였고, 해상과 육로가 모두 열려있는 편리한 입지조건 때문에 헬라의 문화가 꽃피었고, 전통적으로 교육과 문화 및 무역 등이 발달했습니다. 그 명성은 로마시대까지 이어졌고, 많은 유대인들도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했고, 특별히 기독교가 퍼지면서 초기 기독교의 중심도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24절을 보시면,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로마제국의 제2의 도시이며, 헬레니즘 최대의 도시가 된 알렉산드리아에서 나고 자란 아볼로는 많은 학문을 접할 수 있었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었던 에베소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25절을 보시면,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아굴라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게 된 사람입니다. 특별히 그는 구약성경에 능통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해주는 설교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복음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26절을 보시면,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젊은 설교자 아볼로는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 설교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는데, 설교자 아볼로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평신도가 목사님 설교를 듣는데 목사님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시고, 그걸 말씀하시는 거 같은 겁니다.

지난 주간에 필리핀한인교회협의회 목회자 세미나가 있어서 다녀왔는데, 잠시 방문했던 지역이 과거에 한인교회가 부흥했었는데, 최근에 한국 기업이 철수하면서 교회가 썰렁해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지역이 어떤 지역인지 궁금해서 인터넷 서치를 해보던 중에 좀 충격적인 게시글을 하나 봤습니다.

아마도 그 지역에서 신앙생활하고 계신 분이 필고 게시판에 올린 내용인 거 같습니다. 교회와 그 지역 목사님, 선교사님들에 대한 불만의 내용을 토로하시고, 거기에 이런 내용을 덫 붙였습니다.

“… 그리고 정말 설교 짜증납니다. 일 년을 들어도 똑같은 소리, 2년을 들어도 똑같은 소리. 그러면 목사님들은 마음에 문이 안 열려서 그렇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마음에 문이 열리게 설명을 즉 설교를 하면 되는데 내가 보니깐 정말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정신 차리시고 공부 좀 하세요. 남 탓하지 마시고요. 설교에 깊이가 하나도 없어요. 내가 생각하건데 정말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무식합니다.”

필리핀에서 한인목회를 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괜히 저한테 하는 말인 거 같아 뜨끔했습니다. 이 분이 현재 그 지역 교회에 출석하고 계신 성도님이신 거 같은데, 목사님들에 대한 불만이 많으신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글을 본 목사님들이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내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도님이 말씀하신 것이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컴플레인의 방법은 좀 더 신중한 지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좀 남았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무지함을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경우에 그것은 득보다 실이 훨씬 더 많고,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교정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더 공격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더 큰 겁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훈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우리 아이들을 혼낼 때 되도록 제 방에 데리고 들어와서 개인적으로 혼냈었습니다. 그게 훈육의 효과도 좋고, 아이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합니다.

그런 면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모습은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설교자였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평신도였습니다. 이 부부는 젊은 설교자 아볼로를 집에 초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바울 사도를 통해 배우고 깨달았던 복음의 핵심을 아볼로에게 풀어서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 이들이 교만하거나 거만한 사람들이었다면, 젊은 설교자 아볼로를 무시하고, 무식하다고 핀잔을 주거나, 뒷담화를 했을 지도 모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든 깍아 내립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 그에 대해 디스(disrespect)합니다. 그를 디스 해야지 내가 더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14절에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여러분이 습관적으로 자꾸 다른 사람을 높여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낮춰보십시오.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추시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는 점점 높이시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겸손 하라, 진실로 겸손 하라. 왜냐하면 그대는 아직 위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겸손은 자기완성의 토대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그 누구 앞에서든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항상 겸손할 때, 우리는 점점 더 온전해져가게 될 것입니다. 그 겸손은 우리가 이 땅에서 더 잘되고, 더 잘 살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2. 모두에게 배우라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나고 자라,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구약의 율법에도 능통하고, 게다가 좋은 목소리까지 갖고 있어 설교가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던 아볼로(Apollos)의 이름의 뜻이 있습니다.

‘파괴자, 침략자, 웅변가’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아볼로의 뛰어난 언변과 연설과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는다는 의미에서 아볼로란 이름과 잘 어울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꽤 괜찮은 설교자였고, 사람들에게도 꽤 인기가 많은 설교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설교자들의 약점이 하나 있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안 들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설교를 잘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의 설교 내용이 꽤 괜찮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설교자는 학식이 많고, 논리가 탁월하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보다 아는 것도 많고, 많은 지식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로부터 배우기보다는 항상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안 기울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26절을 다시 보시면,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그런데 이 훌륭한 설교자 아볼로가 평신도들한테 복음의 핵심을 배우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저라도 이런 상황이 오면 이걸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제가 수년 동안 우리 집사님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어느 날 우리 집사님 중에 한 분이 저를 초청합니다. 식사를 맛있게 대접하고서는 ‘목사님, 성경 이 부분의 말씀을 이렇게 저렇게 풀어가는 게 맞지 않을까요?’하고 겸손하게 말한다고 해도 ‘집사님, 정말 그렇네요. 제가 그 동안 잘 못 알고 있었네요. 고마워요 집사님, 앞으로 제가 잘 가르칠께요.’ 이렇게 반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아볼로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배우고 난 뒤 그의 설교는 더 힘이 있어졌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지역으로 건너가서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강력하게 변증하고, 증거 하는 설교자가 되었다는 내용이 27절, 28절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구약성경에 능통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듣게 되자, 자기가 흐릿하게 알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선명해졌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설교자 아볼로는 그 대상이 누구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모두에게 배움을 얻게 됩니다.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마음을 닫고, 귀를 닫고 자기만의 생각과 고집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잠언 6:6절 말씀에 보시면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가 뇌를 갖고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체와 같이 정교하고 세밀하고 뛰어난 몸을 갖고 있겠습니까? 우리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무엇인가를 학습하고,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미물 중에 미물이며 평생을 땅에 기어 다니는 아주 하찮은 곤충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개미에게 가서 그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개미에게서조차 우리가 배울 게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9:8절, 9절을 보시면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거만한 자는 누군가에게로부터 어떤 충고라든가, 권면이라든가,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떻게든 듣고 배우려고 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경험이 많아도, 아는 것이 많아도 그는 늘 배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계속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들 중에 지금은 모두 은퇴하셔서 원로목사님으로 계시지만 안산동산교회 김인중 목사님과 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님은 참 겸손하신 분들이십니다. 교회가 그렇게 크고, 성도들이 몇 만 명이나 되는데, 한국 교계의 큰 어른들 이신데도 불구하고 늘 배우려고 하시는 겁니다.

김인중 목사님은 크고 작은 세미나에 강사가 아니라 배우는 학생으로 참여하시기도 하시고, 정필도 목사님은 부목사님들의 설교를 매일 틀어놓고 거기서 은혜도 받으시고 그러신다는 겁니다. 설교의 대가이신 분들이 누구한테 뭘 배우실 게 있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 자세와 태도가 안산에서 가장 큰 교회,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세워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고린도교회에 어떤 당파가 나뉘게 되었는데, ‘바울파’, ‘아볼로파’가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이나 아볼로는 그런 당파를 나눴던 적이 없었고, 바울을 좋아하던 성도들, 아볼로를 좋아하던 성도들이 그렇게 서로가 더 낫다고 다퉜던 겁니다.

아볼로가 바울과 비견될 만큼 고린도교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성도들이 아볼로를 통해 믿음이 성장하고 자랐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아 위대한 사역자로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그런 위대한 사도 바울과 비견될 만큼 평가되고 있는 것은 그가 겸손하게 항상 배우고, 모두에게, 무엇으로 부터든 배우려고 하는 영적 태도와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잘 되고, 잘 사는 길은 이와 같이 항상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잘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생전에 미국의 가장 유명한 방송설교가로 사셨던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1926~2015)’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겸손으로 가는 길은 영광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가 잘되고 잘사는 길은 항상 겸손하고, 누구에게든 무엇을 통해서든 늘 배우는 영적 태도인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영광으로 안내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잠언 말씀과 같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지만,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가 될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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