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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열왕기상 19:1~8> 

열왕기상(36)

 

 

 

독일의 대문호라 할 수 있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는 무명의 작가였지만, 그가 25세 때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이 크게 성공하게 되고, 그 이후 유명해졌습니다. 이 소설은 괴테가 법률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약혼자가 있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자전적 체험을 소설화 한 것이 세계적인 명작으로 탄생한 겁니다.

이 책의 내용은 약혼자가 있는 여인을 사랑한 베르테르가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아 스스로 자살하는 것으로 마감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당시 ‘베르테르 열병(독일어 : Werther Fieber)’이라 불리는 신드롬과 같은 현상을 낳기도 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조차 전쟁터에 이 책을 들고 다니며 읽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럽의 많은 청년들이 소설 속에 묘사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을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베르테르를 모방한 자살이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가 뜻하지 않게 우울증을 전염시키고 자살을 부추긴다는 오명을 얻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자살한 사람만 무려 약 2,000명 정도라고 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74년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필립스(David Philips) 같은 경우는 유명인이 자살을 하고 나서 그것을 모방한 자살이 확산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10월에 20대 유명 여성 연예인이 악플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자살을 해서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또 그로부터 40여일 만인 지난 일주일 전 같이 친하게 지냈던 또 다른 20대 여성 연예인 역시 자살을 했습니다. 저 역시 뉴스에서 이 두 사건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자녀들 같은 한참 때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겠습니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책이 ‘베르테르 열병’이란 이름으로 당시 사회의 신드롬을 일으켰고, 아무리 ‘열병’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2천 명의 젊은이들이 자살을 했겠습니까? 분명 그 젊은이들의 인생 속에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르테르 효과와 같이 어쩌면 그 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 유명하거나 무명하거나…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불쑥 죽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만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의 모습에서도 우린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환경은 우리를 속인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죽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하다가 어느 순간 정말 그 극단적인 선택을 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문에 지난 13년 동안 OECD 자살율 1위를 기록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의 습관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죽고 싶다. 배불러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졸려 죽겠다. 더워 죽겠다. 추워 죽겠다. 좋아 죽겠다. 심심해 죽겠다…’ 이런 잘못된 부정적인 말의 습관을 버리십시오.

엘리야는 지난 열왕기상 18장에서 북이스라엘 왕국 내에 가득했던 바알우상의 제사장, 선지자들 450명과 영적 전투를 치렀습니다. 엘리야는 승리했고, 바알 선지자 450명을 처형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왕비 이세벨이 듣게 된 것입니다.

 

1절을 보시면,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아합 왕은 왕비인 이세벨에게 갈멜산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말했습니다. 그 모든 일에는 바알선지자들이 엘리야의 손에 의해 죽게 된 것도 있었지만,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지만 엘리야에 의해서 다시 비가 내리게 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했다는 그런 내용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세벨은 그건 중요하지 않았고, 바알 선지자들이 죽은 것에 분노했습니다.

 

2절을 보시면,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세벨은 신하를 보내 엘리야에게 경고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죽이리라’했던 것입니다. 왕비 이세벨의 경고에는 살기가 느껴졌습니다. 이세벨이 이 일을 통해 가뭄도 못 끝내는 거짓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좋으련만 도리어 가뭄을 끝낸 엘리야를 죽이려 달려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Elijah was afraid)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이 구절에 보면 ‘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보니 상황이 안 좋은 겁니다. 3년 반 동안의 모든 가뭄을 끝내는 비가 내리게 했으면, 나라를 다시 살린 인물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엘리야가 보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죽는 거는 시간 문제일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멀리 도망가기로 하고, 북이스라엘 끝에서 남유다의 끝을 향해서 도망가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영어 번역에 보시면 ‘엘리야는 두려웠다(Elijah was afraid)’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간 거리만 봐도 그가 얼마나 두려웠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걸어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호렙 산까지 도망을 갔겠습니까?

 

그리고 4절을 보시면,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유다의 남쪽 끝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은 광야 깊숙한 곳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곤 ‘하나님 이젠 그만 할래요.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나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내 생명을 거둬가세요. 나를 죽여주세요. 죽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엘리야가 왜 죽고 싶어 했습니까? 그렇게 바알 선지자 450명하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위해 싸웠는데, 그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죽음의 위협뿐이었던 겁니다.

지난 주일에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님과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님과의 대화에 대해 잠시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목회자들도 교회가 오랫동안 부흥하지 않으면 낙심할 수 있습니다. 왜 낙심하겠습니까? 교회가 부흥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목표가 교회 부흥이고, 꿈이 교회 부흥인데 그게 안 되니 낙심이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생의 목표와 꿈이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꿈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다면, 우리의 꿈이 천국에 있다면… 교회가 부흥하지 않았어도 괜찮은 겁니다. 자기 자신이 무능력해 보여서 낙심하기도 할텐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지난 한 주간 마닐라에서 필리핀 전역에서 목회하고 계신 한인교회 목사님들의 총회와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필리핀에서 한인교회를 목회하고 계신 목사님들의 말씀들을 들어보니 필리핀 한인교회들의 상황은 비슷비슷했었습니다. 어떤 지역은 과거 크게 부흥했었는데 어느 때부터 그 지역의 한인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교회에 성도들도 많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 이런 겉으로 보여 지는 현상들과 환경들과 상황들을 보면 당연히 힘이 빠지고 낙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에 집중하고, 겉으로 보여 지는 외적인 것에 집중하면 우리는 그 환경에 따라 행복했다가 불행했다가 하는 겁니다. 그 환경에 따라 좋았다가 낙심했다가 하는 겁니다.

어떤 성도님은 오랫동안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시겠습니까? 그런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만약 저희 가정이 가는 곳 나라마다 한인교회가 없었다면 저는 정말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힘들고 어려운 타향살이였지만 그래도 교회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제가 우리 성도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저를 이 땅에 부르셔서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게 하신 주님의 소명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나를 통해 또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세우시고 붙드시는 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깐 저의 사명이 교회 부흥이나, 성전을 크게 짓는 거라든가, 숫자적인 큰 교회 성장이라든가… 이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괜히 거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자주 낙심하게도 되고, 그런 게 잘 안 되면 실패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우울한 마음도 들게도 되는 겁니다.

옥한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 같은 죄인을 영광스러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하고, 외국 땅에 한인교회를 통해서 누군가 위로받고 힘을 얻고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환경은 우리를 속입니다. 너는 실패자라고, 너는 무능력하다고, 너는 틀렸다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꿈이 예수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비전이 천국이 되시길 바랍니다. 환경은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돈을 많이 벌기도 하고 적게 벌기도 할 겁니다. 여러분은 세상적으로 성공을 하기도 하고 실패처럼 보이는 그런 환경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 사도는 환경은 그에게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4장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의 지금의 그 환경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그 환경이 여러분을 실패자로, 성공자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은 돈 얼마 벌었다. 어떤 자리에 앉았다. 성공했다 실패했다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이 그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환경에 속지 마십시오.

 

2. 하나님의 산으로 가라

우리가 지금의 환경에 기가 죽거나,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산’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기도 모르게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남쪽 끝에는 하나님의 산 호렙이 있었습니다. 그 호렙 산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하나님의 거룩한 산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칼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는데 이세벨에게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려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갔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남쪽의 맨 아래에는 시내반도에 있었던 호렙 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산이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어쩌면 엘리야는 ‘될 때로 되라.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냥 물도 마시지 말고, 먹을 것도 먹지 말고 그냥 죽어버리자’라고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광야로 하룻길을 들어갔습니다.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되었기 때문에 거기선 물도 음식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광야에서 점점 지쳐갔고, 탈진해 갔습니다. 그렇게 엘리야는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엘리야가 눈을 떠 보니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이 있었던 겁니다. 기진했던 엘리야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 다시 천사가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쳐 쓰러져 죽을 것을 걱정해 주시는 거 같습니다. 마치 투정부리는 아들을 달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역을 하다가 지쳐 쓰러져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겁니다. 말씀 속에서 만나주시고, 기도 중에 만나주시고, 찬양 중에 만나주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마치 천사를 보내셔서 떡과 물로 우리의 기운을 북돋으시듯이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겁니다.

또 사업이 너무 어려워서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라고 생각하기도 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주님이 또 찾아와 주셔서 떡과 물로 쓰러져 가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8절을 보시면,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야고보서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엘리야도 우리 연약한 사람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돌봄 속에 있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돌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천사의 어루만짐을 통해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이 준비해 주신 음식을 먹고 힘을 내서 40일 동안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큰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인 ‘벧엘’로 다시 올라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곳은 야곱이 은혜 받았던 곳이고,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은혜의 장소로 다시 나아갔을 때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했을 때,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산에서 그를 만나주시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죽고 싶을 만큼 힘들고 어려운 시련의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주님의 집을 찾으십시오. 주의 말씀 앞에 돌아오십시오. 주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어루만지심을 경험하십시오. 주님의 공급을 경험하십시오. 하늘의 만나를 경험하십시오.

 

창세기 35:3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이렇게 야곱이 위기 속에서 벧엘로 올라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창세기 35:5절을 보시면,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역전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모든 대적이 떠나갑니다. 모든 위기를 이겨냅니다. 모든 환란 속에서 구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왜 죽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죽을 거 같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 환경에 속지 마십시오.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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