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믿음의 온도”

<마태복음 16:1~12> 

 

[Audio 말씀]


보시는 그림은 프라이팬과 냄비 그리고 요즘 많이들 사용하시는 에어프라이어기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많이 쓰여 지는 기구들일 겁니다.

프라이팬에 비싸고 좋은 올리브유가 넉넉히 둘러져 있고, 냄비에는 깨끗한 물이 한 가득 부어져 있고, 에어프라이기에는 조리를 기다리는 음식재료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요리기구들 안에 아무리 맛있는 요리 재료들과 깨끗한 생수와 맑고 좋은 기름이 부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온도의 변화가 없으면 절대 맛있는 요리는 만들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은 섭씨 100도를 넘어야 끓기 시작하고, 기름은 150도에서 200도는 되어야 끓기 시작하고, 에어프라이어 역시 200도는 되어야 조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적정한 온도에 이르기까지는 조리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온도를 높일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고 해서 요리가 자동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는 전원을 켜주든지, 가스 불을 켜주든지 해야 그 때부터 온도가 올라가고, 각각의 적정 온도에 다다르면 비로소 끓기 시작하고, 요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역시 믿음의 온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 등록교인으로 이름을 올려놨다고 천국가고, 그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 우리의 믿음이 미지근할 수 있습니다. 미지근한 물은 끓을 준비는 하고 있지만 아직 끓는다고 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믿음의 온도를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온도를 올리기 시작할 때 내 삶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간증만 보고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간증의 주인공으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 믿음의 온도를 올리시기를 축복합니다.

 

1. 불신에는 기적이 없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먼저 살펴봐야 할 거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귀환 이후 유대 땅에 머물기는 했지만, 헬라제국과 로마제국 등 제국의 역사 속에 있으면서 유대인들의 여호와 신앙은 점차 흐릿해져 갔습니다.

그 즈음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자’라는 영적 각성이 일어났고, 그 때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파라는 종파가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모세5경 속에 있는 율법을 그들 나름대로 해석해서 613개의 바리새파 규범들을 만들어 철저하게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일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은 다윗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후예들로 알려져 있는 ‘제사장과 그 가문’출신의 유대사회의 부유한 귀족들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각 지역별로 율법을 배우고, 예배하던 ‘회당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문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전 중심’이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그 해석을 했었고, 각 지역의 회당에서 백성들을 늘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적 권위가 있었고, 백성들로부터는 존경을 받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정치적 기득권과 부와 권력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바리새인들은 ‘부활, 내세, 천사의 존재’등 영적 세계에 대해서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권력과 세속의 부에 취해 있었던 사두개인들의 경우는 그런 영적 세계와 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으로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과 부와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좋은데 사후 세계와 천국에 대해서 그리 믿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71명으로 구성되어 있는(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산헤드린 공회의 위원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정치 중에 하나가 각 지역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했는데, 유대지역은 산헤드린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일반적인 부분은 통치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자치 사법기구로서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복음서에는 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주 등장하고, 그들 중에 회심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이들도 나왔지만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종교적 기득권 집단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어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이 구절에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라는 표현으로 봐서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사역에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나오지 않고, 예수를 믿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들은 몇 십 가지에서 몇 백 가지도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를 주와 구세주로 믿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주님(Master, 주인, Lord)’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다른 ‘주님(Master)’이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그들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주인인 것입니다. 때로는 돈이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지식과 자아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여전히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을 버릴 수 없는 죄 된 마음이 그 주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그 사람의 발목을 꽉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시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 사람의 마음에 두 주인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더 강하게 움직이는 그 존재 혹은 그 무엇이 그 사람의 지금의 주인인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인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How I became a christian)’를 읽었는데, 그가 기독교의 나라 미국에 유학 갔을 때 청교도의 나라 미국에서 실망한 내용들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Savior)로는 믿으면서도 자신의 주님(Lord)으로는 믿지 않는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을 찾지 않습니까? 그 때 우리를 죄에서도 건져 주시고, 여러 가지 어려움에서도 건져 주시는 분은 우리의 구세주(Savior)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세주가 우리의 영혼과 인생의 주인(주님, Lord)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겁니다. 자기 욕심과 욕망에 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죄와 자아가 그의 주님(Lord)인 것입니다.

정치인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들 모습을 한 번 보세요. 그들에게서 예수의 냄새가 납니까? 그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의 흔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것이 비단 정치인뿐이겠습니까? 목회자 중에 훌륭한 분들도 많으시지만 그 목사님들께서 진짜 주님으로 섬기는 분이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그 예수님이 진짜 주인이신 거 같습니까?

우리 한국교회의 크리스천들 중에 예수님을 구세주(Savior)로 믿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몸과 인생과 영혼과 전 인격의 주님(Lord)으로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 거 같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지옥 불에 떨어질 우리를 건져 천국과 영생을 얻게 해 주실 것을 믿는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 이상,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우리의 인생과 전 인격의 진정한 주인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 앞에 와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 중에 그 어떤 것으로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 관련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주인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만들어 놓은 613개의 율법 해석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기도 하고, 벌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 백성들의 마음이 예수님께 집중되자 종교적 시기와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과거 그들의 율법해석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들이 율법의 선생으로서 존경을 받았었는데, 이제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을 진정한 율법의 해석자요 메시야로 따르기 시작했던 것이 그냥 싫었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오랫동안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특권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제사장을 물려받은 제사장 가문이었고, 백성들의 존경이 따라왔고, 부와 영광과 명예가 따라왔습니다. 또한 로마시대에는 그들이 유대인 사회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 그룹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는 제사장 가문이었던 사두개인들은 내세와 영생과 부활과 천사의 존재와 같은 영적 세계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부분에서 잠시 말씀 드렸지만, 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부와 권세를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뭐가 아쉽겠습니까? 이 땅에서 너무나도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있는데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있기나 하겠습니까?

이 땅에서 힘들고 어려워야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들은 어느 순간 제사장이 직업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냥 돈 버는 수단이고, 권력을 유지하는 직책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예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3장 58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능력도 나타낼 수 없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믿음의 온도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여’라고 우리를 책망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온도가 끓는점에 다다를 때 기적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2. 믿음에는 염려가 없다

저희 부부는 신학교를 다닐 때 결혼을 했습니다. 저는 파트타임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평일에는 학교를 다닐 때였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수요예배 설교도 담당하고, 모든 예배를 다 참석하고, 토요일과 주일은 전적으로 사역을 했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교회의 모든 사역을 다 담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교회 근처에 옥탑방을 하나 마련해 주셨습니다. 파트타임 사례비 30만원을 갖고 신혼부부가 한 달을 살았으니 경제적인 것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그 때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너무 사랑하는 사람, 늘 같이 있고 싶고, 함께 살고 싶었던 사람하고 부부가 되어 살고 있었으니 돈 같은 거 좀 없어도 그게 그리 크게 느껴지지도, 그리 힘들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코로나19 사태로 유럽과 미국 등 지역사회격리로 인해 남편들이 출근을 안 하고, 가족이 집에 함께 장기간 머물기 시작하면서 가정폭력이 35%나 늘고, 이혼소송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분들도 처음 결혼했을 때는 안 그랬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슬픈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그 커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요?

둘 사이의 사랑의 온도가 식은 겁니다. 신혼 때의 그 사랑, 처음 그 사랑의 온도가 식어버리니 가정의 비극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신혼 때의 그 사랑의 온도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면, 재정적으로 좀 어려워도, 지금 상황이 힘들고 답답하고 불안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좀 부족한 부분들이 보인다 하더라도 그 어려움들을 함께 이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온도가 식어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첫 번째 나타나는 증상은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같은 것들입니다. 믿음의 온도가 뜨거웠을 때는 전혀 그런 염려가 안 되니 평안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온도가 식어버리면 그 때부터 우리는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서둘러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을 때 전도여행 중에 먹을 빵을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다소 생뚱맞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밀가루를 부풀게 할 때 넣는 ‘이스트(yeast)’를 말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조금 전에 책망하셨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빵을 만들 때 쓰는 이스트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제자들은 수근 거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빵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끼리 ‘부식 담당 누굽니까? 그거 알아서 잘 좀 챙겨 오셔야지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책이 뭡니까?’하며 서로 염려하며 논의를 했던 거 같습니다.

 

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그들의 작은 믿음을 책망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곤 9절과 10절을 통해서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말씀하시면서 그런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곳에서는 염려할 꺼리가 못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난할 때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우리가 비천에 처했을 때 우리를 들어 존귀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배에 오르시면 그 무섭던 광풍도 잔잔해 지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의하라고 하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 뭘까요? 그들은 유대인들 중에 그 어떤 사람들보다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보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율법을 해석까지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고, 백성들을 대표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Savior)로 또는 주님(Lord, Master, 주인)으로 믿고 있었나요? 성경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많은 지식이 있지만 믿지 못한다면 그 말씀은 그에게 어떤 능력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이란 분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불신하던 그들에게서 예수님은 어떤 기적도 일으키지 않으셨고 그들을 떠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교훈을 주의하라 즉 그들과 같은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풍랑이 내 앞에 있어도, 당장 먹을 것이 떨어져도, 내 앞이 캄캄하고 막막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어떤 것도 보장된 것도 내 손에 쥐어진 아무 것도 없지만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모든 염려와 불안과 걱정과 근심들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에는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19세기 유럽 대부분을 정복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는 근대 유럽이 배출한 최고의 군사적 천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에가 누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황제로서 살아 온 지난 세월 속에 가장 무서웠던 때는 언제 였습니까?”

 

그 질문에 나폴레옹은

 

“일주일에 한 번, 전용 미용사를 불러 수염을 깍을 때였네”라는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그 미용사가 적들에게 큰 뇌물을 받고 변심하여 나폴레옹의 면도를 할 때 그 면도날로 그의 목을 베지는 않을까? 염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매주 한 번씩 그 두려움을 앉고 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제가 여기서 7년 동안 목회를 했지만, 지금처럼 이 세부에 살고 계신 분들이 힘들고 어려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었다면 매일 염려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매일 그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사니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평안이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믿음의 사람을 돌보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의 구세주(Savior)로서, 그의 구원자로서, 그의 주님으로서 그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온도를 높이십시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Add a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