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역설(逆說)”

<고린도후서 12:7~10> 

 

[Audio 말씀]

 

지난 8월 24일에 우리나라 대통령이 부산의 한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어떤 목사님의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하면서 뉴스에 크게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부산 샘터교회를 담임하는 안중덕 목사님의 『코로나 시대가 전해주는 메시지』라는 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1.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것은 ‘잠잠하라’는 뜻입니다. : 막말과 거짓말을 하지 말며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2. 손을 자주 씻으라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닦으라’는 뜻입니다. : 악한 행실과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성결하라는 말입니다. 안과 밖이 깨끗하면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3. 사람과 거리를 두라는 것은 ‘자연을 가까이 하라’는 뜻입니다. : 사람끼리 모여 살면서 서로 다투고 상처를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공기와 물과 자연의 생태계를 돌보며 조화롭게 살라는 말입니다.
  4. 대면 예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 위안을 얻거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예배당에 가지 말고 천지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5. 집합을 하지 말라는 것은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라’는 뜻입니다. : 모여서 선동하거나 힘자랑하지 말고 사람이 그리운 이들의 벗이 되라는 말입니다.

만약 대한민국 정부가 고의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한다고 한다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함께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면, 그들이 바로 오늘날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마음으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안중덕 목사님의 글과 같이 지금 어렵고 힘든 이 상황 속에서도 역설적인 진리들을 찾아내는 이들이 크리스천들인 것입니다.

보통 ‘역설(逆說)’이라는 말은 ‘겉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듯하나 그 안에 중요한 진리가 숨겨져 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는 21세기 들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전 세계가 전염병의 공포 속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고, 불투명한 미래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돼는 상황 속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갖고 있어야 할 역설적 믿음이 무엇인지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사도들 중에 예수님께 가장 늦게 부름 받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부름 받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도들 보다 가장 사역의 범위가 넓었고, 가장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도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와 선교사가 되어 1차~3차 그리고 로마와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파함으로 유럽 복음화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었습니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 13권이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들이 쫓겨나가게 되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을 보시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하는 불치병이 있었습니다. 이 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성경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많은 역사가들과 성경학자들은 ‘간질병’으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뇌질환 중에 하나인 간질병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심한 경우에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하고, 손발을 심하게 떨기도 하고, 눈이 돌아가고 혀를 깨물기도 하고, 입에 거품을 물기도 합니다. 제 주변에 있는 분 중에도 간질로 고생하는 분들이 있어서 몇 차례 그 발작을 목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분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참 난감하고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성경에서도 귀신들린 자식을 둔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보면 증상이 꼭 간질증상하고도 비슷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바울에게 있었던 그 불치병은 사도 바울에게도 극심한 고통을 안겨줬던 것으로 보입니다. 육체의 고통도 고통이었겠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고, 다른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는 사도가 정작 자신의 질병은 고치지 못했던 것은 늘 마음의 큰 짐과 같은 거였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큰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은 그 질병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세 번 간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 번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수’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세 번 혹은 계속해서 그 병을 치유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그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겁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가장 부끄러울 때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던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성도들에게는 ‘기도하면 된다.’라고 말하는데, 정작 내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을 때 목회자로서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성도들은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저에게 가져와서 ‘목사님 기도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걱정 마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게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제가 그 성도 보기가 참 민망합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실패한 것 같고, 믿음이 없는 사람 같고,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다시 보시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은 못 고칠 질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병을 고쳐 주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어떤 사도보다 많은 영적인 세계를 경험했던 거 같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사도 바울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쉽게 교만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해결되지 않는 어떤 고민과 문제가 있을 때, 사람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자신도 하나님 앞에 연약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고, 여러분이 도전한 일이 실패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 하나님의 또 다른 플랜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때문에 이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미국의 ‘자동차 왕’이라고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는 최초로 자동차를 만든 사람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입해서 탈 수 있는 자동차의 대중화와 대량생산을 이끈 사람입니다. 오늘 날의 자동차 왕국 미국을 있게 한 사람이 헨리 포드였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는 그의 능력을 제한한다. 실패는 더욱 똑똑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 실패를 디딤돌로 사용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 실패가 성공의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는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또한 그가 그의 병을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을 때, 그 괴로움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상황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오랫동안 공들였던 일에 실패했다고 낙심하고, 거기서 더 이상의 도전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내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했어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또다시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그 실패 속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고, 문제점을 개선하고, 새로운 교훈을 얻는 사람들은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다가 결국 진짜 성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실패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또 다른 은혜를 믿기 때문입니다. 내 계획과 내 생각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플랜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계획은 실패했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이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나의 실패가 나의 간증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 실패라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과거의 실패를 끄집어내어 다시 말하기가 꺼려질 수 있습니다. 되도록 그 문제만큼은 그냥 감추고 살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목사님께서 감기에 걸리셔서 제가 감기약을 사다 드릴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님께 감기약을 전해 드렸는데 목사님께서 ‘전도사님, 성도들에겐 제가 아파서 감기약 먹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 그러시는 겁니다. 성도들의 문제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도 하고, 성도들이 아플 때 치유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이 자기 감기 하나 못 고치고 감기약 먹은 게 혹여 라도 흠이 될까 염려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가 되어 보니 그 목사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픈 게 죄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목사가 늘 ‘아프다. 아프다. 힘들다. 힘들다.’하고 싶지는 않은 겁니다.

그러니 위대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질병을 얘기하고, 그 질병을 위해 기도했는데 응답 받지 못했다는 것을 말할 때, 그것을 꺼내놓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꺼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바울 사도가 자신의 약함과 응답 받지 못한 기도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지를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가 ‘하나님, 제 병 좀 고쳐 주세요. 설교하다가도 발작하기도 하고, 길을 가다가도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데…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성도들의 질병은 고쳐 주는데 제 병은 아무리 기도를 드려도 낫지를 않습니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둘째 치더라도 사역을 하는데 덕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너무 괴롭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깐 사도 바울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응답을 하셨지만 사도 바울의 생각대로 응답을 하지 않으신 것뿐입니다.

꼭 우리의 생각대로 응답해야지만 응답받은 건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기도했던 것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게 진짜 응답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잘못 구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을 몰라 내 욕심을 부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기도했을 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되,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도록 응답하신 것입니다.

만약 바울 사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만 하면 병도 낫고, 문제도 해결되고, 역사도 일어나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 기도했더니 자기의 불치병도 고쳐지고, 가는 곳마다 박해와 핍박도 없고, 홍해가 갈라지듯이 역사가 나타나고,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좋겠죠. 하지만 사람은 뭔가 문제가 없고 모든 일이 다 잘 된다 싶으면, 정말 너무 쉽게 교만해 집니다. 모든 걸 내가 다 한 거 같고, 내가 제일 인거 같고, 사람들보다 더 잘난 거 같고… 그런 거만과 오만함이 내 마음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5장5절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셨습니다. 모든 물은 높은 곳에서 낫은 곳으로 흘러내리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히 낮아진 심령으로 흘러가고, 겸손한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문제 한가지씩은 있더라구요. 믿음은 좋은데 물질 문제가 있고, 사람은 정말 좋은데 자녀 문제가 있기도 하고, 질병을 갖고 있기도 하고, 시댁 문제가 있기도 하고, 다 좋은데 어떤 사람이 나를 이유 없이 괴롭히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나쁜 게 아닙니다. 사람은 문제꺼리 하나 정도 있어야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겸손해 집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시는 겁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 겸손한 사람, 기도의 사람을 쓰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미련한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역사가 자기의 잘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만한 그런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변화되기 전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받은 최고의 학벌을 자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기를 열심히 했다는 것이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이후 바울은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약할수록 주 예수님이 그를 통해 더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약하다면, 지혜가 부족하다면, 가난하다면, 힘이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고아처럼 자란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성격도 너무나도 내성적이어서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고, 자신감도 없어서 사람들은 제 입에서 말소리 듣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모든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던 제 성장기는 참 불행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었지만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건강이 약해도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련해도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쑥스러워 길조차 못 물어보던 제 입에서 능력의 말씀이 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눈을 뜨고 나니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질병과 나의 연약함과 아픔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실패가 나의 간증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4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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