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1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시편 42:1~5> 

 

 

 

[Audio 말씀]

 

2020년의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Pandemic)’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중국에서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이 전염병이 이렇게나 심각한 상황으로 우릴 몰아넣을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후 한 달 뒤 2월18일 ‘신천지 대구교회 발 코로나 대확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코로나 확진자는 30명밖에 안 되었던 때였습니다. 순식간에 확진자는 폭증하기 시작했고, 한 달 만에 대구•경북지역 코로나 확진자는 8천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1만 명대를 넘어서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 후 우리 방역당국과 의료진들 치열하게 코로나와의 전투를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7, 8월 해외에서 유입되는 코로나 감염자 외에 국내 감염자는 한 자릿수, 두 자릿수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코로나 대응 모범국가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8월15일 이후 ‘사랑제일교회 발 코로나 2차 대확산’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교회 관련 확진자가 1천명이 넘어서고, 방역을 방해하는 등의 이유로 담임목사가 수감되는 일이 벌어졌고, 서울시는 그 교회에 46억 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다.

신천지발 대확산의 경우 그들이 이단으로 규정된 사이비집단이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공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제일교회의 경우는 일반적인 교회였기 때문에(물론, 극우 정치 집단이기 때문에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그냥 교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쨌든 이런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모범이 되어야 할 한국교회가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방역을 방해하고, 도리어 전염병을 확산하는 주범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의 선량한 크리스천들과 교회들까지도 싸잡아 욕하고, 조롱하고,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믿는 자들이 어디 교회 다닌다는 말을 하기가 불편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제 세상에서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나빠졌고, 앞으로 불신자 한 사람을 전도하기는 정말 쉽지 않을 거 같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교회조차도 하나님께 보호 받지 못하고 시련을 겪는 거 같아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도 시련과 어려움이 왔을 때, 내가 앞으로 가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거 같고 뒤를 돌아봐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을 때 우리는 ‘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지? 왜 날 돕지 않으시는 건지?’ 의문을 갖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성실하게 예배하며 봉사하며 정직하게 살아왔는데, 나 뿐 아니라 우리 온 가족들이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 같은데… 왜 이런 상황이 왔는지? 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건지?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 나의 절망의 순간에

목회자들이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할 심방원칙 중에 하나가 ‘기쁘고 좋을 때 100번 심방하는 것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한 번의 심방이 더 낫다’는 겁니다. 내가 정말 힘들 때, 누군가의 도움을 정말 필요로 할 때 어떤 분이 나와 함께 있어주고 내 손을 잡아준다면 그것만큼 고맙고 힘이 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정말 믿었던 사람, 의지했던 사람이 나의 시련의 날에 나를 외면한다면 그것만큼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본 시편의 시인은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사슴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라는 문장의 히브리어 원어적인 의미는 ‘사슴이 타는 목마름에 헐떡거리며 물을 찾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이 문구를 ‘울부짖으며 찾음같이’로 번역해야 원문의 의미가 더 살아난다고 말했습니다.

두세 달 전에 저희 집 앞에 있는 계단에 물이 담겨있는 작은 그릇이 놓여 져 있는 겁니다. 저는 그곳에 모기가 알을 낳을까 해서 그걸 버리려 했더니 저희 아들이 하는 말이 ‘아빠, 집 앞에 지나다니는 고양이 어미하고 새끼가 땅바닥에 고여 있는 에어컨 물을 핥길 래 깨끗한 물마시라고 제가 매일 떠 놓고 있어요.’ 그러는 겁니다.

사람은 물이 마르면 수돗물을 마시거나, 우물물이라도 파서 마실 수 있는데, 동물은 사람이 물을 주지 않는 한 시냇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탈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찾는다고 표현했지만, 마틴 루터의 해석과 같이 ‘울부짖으며 찾는다’는 것이 더 가깝습니다. 그 시냇물을 못 찾으면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시면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 보면 “갈급함 같이, 갈급하나이다. 갈망하나니” 같은 비슷한 표현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시인의 상황이 얼마나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 시냇물을 찾는 사슴의 헐떡임과 같이 울부짖으며 주님을 찾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 응답이 없으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은 거 같은,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왜일까? 왜 응답이 없으신 것일까?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왜 나의 절망의 순간에 짠하고 나타나 돕지 않으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괴로운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그런데 더 괴롭고 힘든 것은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조롱하는 말들이었습니다. ‘너 예수 믿는다 하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도 하고 그러는데 왜 너의 삶은 이렇게 힘든 거냐?’ 누가 내게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의 그런 시선들, 그런 감정들이 느껴질 때 마음이 더욱 더 힘든 것입니다.

이곳에 처음 개척했을 때 모든 일이 순조롭고 형통하게만 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개척 초기 사람들로 인해서 실제로 힘든 일을 겪게 되었을 때는 제 마음이 많이 낙심이 되었었습니다.

한국에서 열정적인 젊은 목사가 와서 개척을 한다고 하니 지역 선교사님들 그렇고, 세부 교민들 중에도 저와 우리교회를 기대하고 주목하고 계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간판도 없이 예배를 시작했는데, 물론 자리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1년도 채 되기 전에 좌석이 거의 다 채워져 갔었던 겁니다.

하지만 개척 초기 몇 년 동안은 참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험들이 교회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다 침체되고, 다시 부흥하다 또 시험에 빠지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 저를 더 힘들게 했던 것 중에 하나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던 거 같습니다. ‘젊은 목사가 자신감 넘치게 목회하더니 의욕만 앞섰네. 이민교회 개척이 쉬운 줄 알았나?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를 강조하는 목사가 어디 얼마나 더 하나 보자…’ 물론, 그리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시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혹은 사탄의 거짓속삭임에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시편 42편10절은 오늘 본문3절과 비슷합니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기도하다고 하는데 뭘 응답 받았느냐?’ 라고 하며 나의 대적이 조롱하는데 그것은 “내 뼈를 찌르는 칼 같다”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질문이 저절로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의 기독교는 오랫동안 박해 속에 있습니다. 중국 근현대 기독교의 4대 족장 중에 한 사람인 ‘위안상천(앨런 위안)’목사님은 신앙의 이유로 20년이 넘도록 투옥되어 갖은 고처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석방된 이후에도 10년 동안 우리로 말하자면 주민등록증과 같은 공민증이 주어지지 않았고, 정부와 경찰의 보호관찰 대상자로 분류되어 자유롭지 않은 생활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중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기독교 저술가인 필립 얀시(Philip Yancey,1949~)와 비밀리에 짧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아흔 살의 위안상천 목사님이 필립얀시 목사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사도 시대와 같아요. 이곳 기독교인들은 박해받고 있지. 하지만 홍콩이나 타이완을 보게. 그들은 모든 게 있지만 하나님을 구하지 않거든.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감옥에 들어갈 때보다 감옥에서 나올 때 믿음이 더 강해졌어. 요셉처럼 우리도 힘든 시기를 지나는 이유를 당장은 모르다가 나중에 돌아볼 때야 알게 되지. 생각해 보게. 중국의 우리는 머잖아 세상에서 가장 큰 기독교 공동체가 될 거야. 그것도 우리를 말살하려는 무신론 정부 밑에서 말이야.(필립얀시,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p.68)”

때로 나의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고, 응답도 없고, 마치 나를 버리신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죽음의 감옥에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의 대학, 광야의 대학에서 나를 훈련시켜 이전보다 더 큰 믿음의 용사로 만들어 가시는 중이실 수 있습니다. 그 시기를 지나 가족뿐만 아니라 민족과 세상을 살리는 이 시대의 요셉으로 세워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박해 속에 있는 중국 기독교 공동체가 언젠가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공동체로 세워질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나의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2. 나의 소망을 주님께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인은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성전을 위해 열심을 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에는 그가 많은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하며 함께 하나님의 집을 향해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다’는 표현을 보면, 그는 그 신앙 공동체의 리더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그가 전도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를 신앙적으로 존경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음의 모델로 삼고 그를 따라 신앙생활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하반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시련과 고난 속에 있는 그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들의 믿음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그에게 큰 고난과 시련이 온 겁니다. 누구보다 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 형통해야 할 사람이 그런 환난 속에 있으니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시인은 마음이 상했던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이며,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했던 욥이 고난을 당하자 친구들은 처음에 욥을 위로 하러 왔다가 자꾸 의문이 드는 겁니다. 그들은 ‘욥이 죄를 짓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결국 그들은 욥을 책망하고 정죄하여 욥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앞부분에서 잠시 말씀드렸었던 필립 얀시 목사님에게 있었던 사건을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가 2007년 2월 뉴멕시코 주에서 강연을 마치고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도로 위에 얼어 있었던 블랙아이스에 미끄러져 차가 도로를 벗어나 다섯 번 구르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목이 부러지고 겨우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까지 가 있었습니다.

근처 병원으로 긴급 호송된 그는 들것에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환자가 그렇게 아파하는데도 처음 몇 시간 동안은 진통제를 주지 않고 환자의 반응만 검사했습니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꼬집고 핀으로 찌르면서 “아픕니까? 느낌이 옵니까?” 필립 목사님이 “예! 예”라고 대답하면 그 의사는 살짝 미소 지으면서 “좋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경험을 떠올리며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각은 내 척수가 손상되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고통은 내 몸이 성하다는 생명의 징후였던 것입니다. 느끼지 못하는 몸 앞에서는 의술도 무력해집니다.”

 

때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살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2013년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 땅에 주님의 교회를 개척했는데, 지금 우리교회는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성도들이 한국으로 철수했고, 현장예배가 자유롭게 시작된다 해도 남아 있는 성도들이 얼마 없기 때문에 이 넓은 예배당은 썰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교회에 왜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겠습니까? 우리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필리핀과 세부에 비전을 갖고 여기에 왔고, 여기서 좋은 교회 공동체를 만나 함께 행복하게 신앙생활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모든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 학교도 포기하고, 사업장도 접고, 집 안에 있던 가전제품이며 가구며 다 헐값에 팔아버리고 그렇게 빈손으로 한국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우리교회에 오셔서 함께 이 땅의 부흥을 보길 원하고, 교회를 통해 이룰 비전을 함께 보기를 원했는데 갑작스럽게 모든 것들이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큰 시험과 환난 속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조롱하고 모욕하고 심지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가 기독교라고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시련 속에서 큰 아픔과 통증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형사고 이후의 필립 얀시와 같이 몸의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아직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신경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의사가 뽀족한 것으로 찌르는데도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오히려 회생의 가능성이 더 낮습니다. 진짜 절망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하지만 내 몸에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을 여전히 내 몸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소생하고 회복할 수 있다는 생명의 징후인 것입니다.

 

시편 42편 5절 말씀을 보시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시험과 시련 속에 있을 때 가장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어떤 환경보다도 바로 나 자신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향해 뭐라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나쁘게 바라보거나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거 같아. 저 사람이 나를 경멸의 눈으로 보고 있는 거 같아. 저 사람이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고 다니는 거 같아.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이 느껴져. 사람들의 나쁜 감정이 느껴져…’ 이러고 있는 겁니다.

또는 지금의 예상치 못했던 불안정한 환경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내가 끝나는 건가? 나는 이렇게 실패자로 마치는 건가? 나는 더 이상 재기하지 못하고 마는 걸까? 나는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일까?…’ 이러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내 속에서 불안해하고 염려 속에 갇혀 있는 나의 영혼을 향해 명령하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서 내게 나타나 나를 도우실 것이다. 그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그 분의 행하실 일을 찬양하라.’라고 명령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낙심과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먼저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다시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회복되면 마음이 힘을 얻고, 마음이 새로워지면 육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1922~1999)’는 폐결핵으로 이삼십 대의 13년간 요양생활을 했는데, 그 기간 중에 친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쓴 『빙점』이란 책을 통해 유명한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리곤 60세 되던 무렵에 직장암 선고를 받게 되고, 기나긴 투병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몸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의 시계가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낙심과 절망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우라 아야꼬는 그 투병기간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았고, 날마다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고, 건강이 따라주지 않을 때는 남편이 대필하게 하여 저술활동을 이어가며 그렇게 77세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험과 시련과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어 불안해하며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가 아닌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시작하면 맘속의 모든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절망과 낙심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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