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4:1~6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은 수개월에 걸친 성전 건축 준비를 한 뒤,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바닥 공사를 마쳤습니다. 이제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으면서 성전을 완공해 나가면 되는 거였습니다. 비록 규모 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과거 솔로몬의 성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성전터 공사를 마친 후 온 백성들은 기뻐하며 감격 속에 예배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사탄은 그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방해를 놓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듯이, 왕관이 클수록 그 무게가 나가듯, 큰 축복과 영광에는 언제나 큰 시험과 시련과 고난 같은 것들이 동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과 시련과 시험이 있을 때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불순물이 섞이지 말게 하라.
우리가 어떤 일과 계획을 추진해 나가게 될 때, 장애물과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편법이나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순물이 섞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 순수함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겁니다.
에스라 4장 2절을 보시면,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과거 남유다의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그 찬란했던 예루살렘 영광의 성전을 재건한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대적들이 등장한 겁니다.
과거 북이스라엘 왕국이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는데, 앗수르 제국은 북이스라엘의 비천한 농부들만을 남겨두고, 앗수르 제국 각 지역의 사람들을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로 이주시켜서, 북이스라엘의 비천한 농부들과 섞여 살게 했고, 그 사이에서 많은 혼혈 민족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종류의 이방신들을 섬겼고, 일찌감치 여호와 신앙을 떠나 다신교, 혼합종교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3절을 보시면,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총독 스룹바벨과 족장들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어떻게 보면, 함께 연합해서 하면 좋은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때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함께 연합해야 할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결코 손을 잡지 말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성소수자 문제’가 계속 이슈화되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교묘하게 파고드는지 모릅니다. ‘소수자가 차별없는 세상’ 이런 구호가 얼핏 들으면 얼마나 좋아 보입니까? 하지만,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고 교묘하게 말한 것과 같은 겁니다. 어떤 소수자, 약자도 차별 받아서는 안 되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도덕적 규범, 사회적 규범 안에서 그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겁니다. 동성애는 죄입니다.

둘째, 의를 위한 고난을 기뻐하라.
여러분들이 정의의 편에 설 때, 바르고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의를 위한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고, 죄는 거룩을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시면,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사마리아의 혼혈종족들은 본격적으로 성전 재건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제국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을 법적으로 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은 무려 16년 동안 중단되게 됩니다.
10. 다른 일도 아니고, 성전 재건이라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하는데 왜 이런 고난과 시련이 오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조건 순탄하고 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야 고난이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 그것에는 더 깊고 넓은 그리고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 일이 진행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 성공과 형통으로 얻을 수 없는 것, 고난과 시련이 아니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9편 67절에서도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고난이 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면, 그 고난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들을 걸러내고, 새로운 은혜들과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이 더 성숙해지고, 우리의 인격이 더 성숙해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오늘 교훈하시는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불순물이 섞이지 말게 하라
둘째, 의를 위한 고난을 기뻐하라
기억해야 할 한 문장: 고난이 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면, 그 고난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들을 걸러내고, 새로운 은혜들과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이 더 성숙해지고, 우리의 인격이 더 성숙해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내게 있는 고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