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자존심

에스라 8:21~23

21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제가 학부와 대학원을 모두 신학교를 다니면서 7~8년을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강도사를 거쳐 목사가 되어, 의정부에 있는 교회에 부목사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곤, 대부분의 한국교회 교역자들의 경제 사정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제가 의정부에서 작은 전셋집을 얻으려고 하는데 돈이 많이 부족해서, 은행에 전세자금 대출을 받으러 갔더니, ‘목사는 대출 안 해 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보증을 서주면 대출해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죄송했지만, 우리 장인어른께 부탁드려서 장인을 보증인으로 대출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장인 볼 면목도 없고, 목사라는 사람이 그 돈 얼마가 없어서 은행에 가서 ‘대출이 되니 안 되니…’ 하는데,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돈이 없으면 은행 가서 적법한 절차 밟아 대출도 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장인께도 면목이 없었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목사로서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목사로서 성도들 앞에서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신다’ 이렇게 힘차게 설교도 하고 그러는데, 정작 저의 현실은 좀 초라했던 겁니다.

저의 부끄러운 스토리를 잠시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때로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구한다는 게 영적으로는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2차 포로 귀환을 이끌게 된 선지자 에스라가 그 영적 자존심 때문에 세속의 왕에게 도움 청하기를 포기했던 일이 나옵니다.

첫째, 기도 제목이 생긴 건 복이다.

우리 주변에 나를 도와 줄 사람이 많다는 것, 내가 의지할 사람과 환경이 많다는 것은 복인 거 같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보자면 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내게 방법이 없고, 누구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도 제목이라는 것은 내 힘과 방법으로 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시면,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선지자 에스라는 성인 남자만 약 1700여명(여자와 아이들 포함 약 5,000명)의 제2차 포로 귀환자들을 이끌고 4~5개월에 걸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서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평탄한 길을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었는데, 22절을 보시면,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에스라는 자기가 모셨던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에게 종종 하나님이 누구신지, 말씀이 무엇인지를 전하곤 했던 겁니다.

이 부분을 [쉬운 성경]의 번역에서는 에스라가 페르시아 왕에게 “누구든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지만,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은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곤 했던 겁니다. 이렇게 말하곤 했는데, 정작 현실에서는 예루살렘행에 동행할 호위 부대를 요청하는 것이 영적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에스라 7장 6절에서 에스라에 대해 소개하기를
“…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라는 표현이 있는데, 만약 에스라가 호위 부대를 왕에게 요청했어도 아닥사스다 왕은 얼마든지 호위 부대를 붙여줬을 것입니다. 에스라 일행은 엄청난 돈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수시로 나타나는 약탈꾼들과 도적 떼로부터 일행을 보호하는 것이 인솔자의 책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에스라의 영적 자존심으로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스라에게 방법과 대안이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고, 보호자가 있었다…’라고 한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금식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라의 유일한 방법과 대안은 오직 하나님이셨고, 기도와 금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사건을 성경의 역사로 보고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기도할 제목이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큰 복입니다.

둘째, 믿음과 기도의 간증자가 되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간증할 제목들이 늘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를 않으니깐, 기도라는 것을 하지 않으니깐 교회를 왔다갔다해도 간증할 제목이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에스라는 5천 명을 이끌고 호위 부대 없이 4~5개월의 예루살렘행을 떠났는데, 당시의 그 흔하디흔한 약탈과 도적 떼로부터 어떤 해도 입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손으로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31절을 보시면,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에스라가 영적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했는데, 그것이 에스라 개인의 어떤 자신감과 자존심 같은 게 아니라, 그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 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는 제목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기 힘들다는 이 세부 땅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교회가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 성도들 이 땅에서 축복의 모델이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믿음의 모델이 되게해 주시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통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며 살기를 바랍니다.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기도 제목이 생긴 건 복이다

둘째, 믿음과 기도의 간증자가 되라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우리가 예수를 믿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통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며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묵상:당신은 어떤 부분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길 소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