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10:1~5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방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5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19세기 독일의 한 생리학자(Friedrich Goltz)가 ‘영혼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1869년)’라는 실험에서 뇌가 제거된 개구리를 물에 넣어 서서히 끓였는데 탈출하지 않았고, 뇌가 온전한 개구리는 25°C에서 탈출을 시도한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872년에 또 다른 학자인 ‘하인즈만(Heinzmann)’에 의해 진행된 또 다른 실험에서는 정상적인 개구리일지라도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물에서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얻었고, 1875년에도 또 다른 학자(Fratscher)에 의해서도 확인이 되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설은 ‘서서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는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삶아져 죽어간다’라는 겁니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Boiling Frog)’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서히 어떤 변화가 있을 때 그것에 반응해서 변화하지 않으면 망하지만, 그 변화에 맞춰 대응하고 반응하면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깨닫는 자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과 유다에 돌아온 백성들이 그 땅에 살아간 세월도 80년이 흘렀고, 성전을 건축한 지는 60년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제사장 겸 선지자였던 에스라가 바벨론 2차 포로 귀환을 이끌며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와보니, 여러 가지 영적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방인들과의 자유로운 혼인 문제였습니다.
에스라 9장 1절과 2절에 의하면, 이것이 유대 공동체 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먼저 율법에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지했던 규례를 너무나도 쉽게 어기고 있었던 것이고, 그로 인해 주변 이방 민족의 여러 우상들이 유대 사회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방백들과 고관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이 이방인들과의 혼인에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던 것입니다. 에스라 9장은 이 일에 대한 에스라의 통곡과 회개의 기도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 10장 1절을 보시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페르시아 왕을 섬기던 고위 관직자였지만, 제사장과 율법 학자와 선지자로서 예루살렘에 온 새로운 지도자 에스라의 통곡과 회개의 기도를 들었던 백성들도 마음의 찔림을 받아 함께 회개하는 영적 각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2절을 보시면,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백성들의 리더 중에 한 사람이었던 스가냐 라는 사람이 에스라에게 유대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이방인 여자를 맞아 범죄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반절에서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드러날 거 같으면 오히려 더 꼭꼭 숨기고 싶어하고, 자기합리화로 덮으려 하기도 하고, 그 죄를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당장에는 순간의 위기를 모면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게 없듯,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되어 있고, 그때 이전보다 더 큰 수치를 당하게 되고, ‘위증죄’를 더해 ‘가중 처벌’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솥에 빠진 개구리와 같은 겁니다. 그러나 2절 말씀과 같이 자신의 잘못과 실수와 죄를 깨닫는 사람은 아직 소망이 있는 겁니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죄를 뒤로 하고, 새로 살 길이 열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셨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내게 살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깨닫는 자에겐 아직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둘째, 깨달음에서 멈추지 말고 결단하라.
무엇보다 깨닫는 게 먼저이고, 아무에게나 그런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 성령께서 어떤 깨달음을 주셨다면 그냥 깨달음 자체로만 머물면 안 됩니다. 그 깨달음과 함께 죄를 청산하는 결단이 반드시 뒤따라 와야 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단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수년간 혹은 그 이상의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아내와 자식들을 집에서 내보낸다는 겁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당시 이방인이었어도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이고, 유대 공동체 안에 살아가던 이방 족속들과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만약, 이방인 아내와 그들의 후손들이 여호와 신앙을 인정하고, 그 공동체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이방 우상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이라면 그 유대 공동체 내에서 내보내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만큼 이후로 여호와 신앙의 유대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겠다는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단이 쉽다면, 죄를 끊어버리는 게 쉽다면, 모든 세상의 욕심을 버리는 게 쉽다면… 거기에 어찌 ‘결단(決斷)’이란 말을 쓰겠습니까? 하지만, 깨달음에서 멈추지 말고 결단해야 새로운 기회가 시작되고, 살길이 열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아직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깨닫는 자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
둘째, 깨달음에서 멈추지 말고 결단하라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셨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내게 살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깨달음과 함께 오늘 내가 결단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