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도해야 하는가?

느헤미야 2:1~3

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 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동유럽의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교회는 박해를 받았는데, ‘리차드 범브란트(Ricaard Wumbrand)’ 목사님은 감옥에 투옥되어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언제 그 사형 집행이 이뤄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 범브란트 목사님은 성경 속에 ‘두려워 말라’는 의미의 말씀에 동그라미를 치며 그 숫자를 세어 봤는데 365회(366회) 나와 있더랍니다. 하나님께서 1년 365일 내내 염려하지 말라는 깨달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도에 대한 언급’은 몇 번이나 될 거 같습니까? 약 650회가 나옵니다. 저는 이 통계를 보면서 ‘염려와 걱정 한 번 할 시간에 기도는 두 배로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맞는 게, 부정적인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염려와 걱정이 올 때마다 기도하고 그 위에 또 기도하면 염려와 걱정을 기도와 믿음으로 덮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약 650회 정도 ‘기도’에 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시고, 또 강조하시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할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첫째, 기도의 양을 채워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고전과 동화 등에는 어떤 주문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라든지, ‘마법의 거울’이라든지, 우리나라 전래동화 속에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에도 ‘금 나와라 뚝딱!’하고 주문을 외우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문 외우듯 무슨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지거나 그러는 효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2장 1절을 보시면,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동족들의 환난을 처음 들어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했을 때는 1장 1절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이었고, 오늘 본문의 2장 1절은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약 4~5개월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관원이었기 때문에 왕에게 포도주를 따라 올려 드리고 있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2절을 보시면,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아닥사스다 왕이 포도주를 올리던 느헤미야의 얼굴을 보니 안색이 티가 나도록 너무나도 안 좋았던 겁니다. 이 말은 느헤미야가 지난 4~5개월 동안 심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잣은 금식을 했고, 주야로 애통해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느헤미야에겐 방법이 없었고, 그러니 더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기도가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어떤 주문이 아니란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소원성취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기도의 양’과 관계가 있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시간과 양에 따라서 그 관계의 깊이가 깊어지기도 하고, 더 친밀해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시간과 양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그 관계는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때론 어떤 경우의 기도는 긴급하게 응답되어야 할 것도 있고, 많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없는 긴박한 상황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상황들과는 별개로 ‘기도의 양’이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해서 우리 성도들을 양육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도’라는 것을 직접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이후 10년간 새벽기도회를 하다가, 요즘은 여기 상황에 맞게 [아침 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교육도시답게 조기유학 온 학생과 엄마들이 많이 있는데, 한국은 아침 9시까지 등교하지만 이곳은 보통 아침 7시 30분까지 등교해야 하고, 점심 도시락도 싸줘야 하고, 대부분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줘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집사님들이 새벽기도를 하면 오래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는 겁니다.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 깨워서, 씻기고, 밥 먹이고, 도시락 싸서 아침 7시 30분 전까지는 학교 정문에 내려줘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가 이곳 실정에 맞지 않는 거 같고, 성도 한 사람이라도 더 기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전 8시에 하는 [아침 기도회]로 바꿨는데, 성도들이 더 많이 나오시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때 기도하고 시작하니 훨씬 더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하지 않던 분들이 기도를 시작하고, 그렇게 6개월, 1년을 기도회에 나오시면서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성숙해 지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소원 성취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양육 받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의 양’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8장 3절, 4절에 보시면,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올리는 금향로에는 향이 가득한데 그것이 기도와 합하여 주님께 올려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성도들의 많은 기도’ 즉 ‘기도의 양’과 관계있다는 겁니다.

느헤미야가 믿음이 부족했을까요? 기도가 부족했을가요? 인격과 신앙이 부족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4~5개월에 걸친 금식과 기도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시간을 통해서 느헤미야의 마음과 인격과 신앙과 믿음을 더욱 더 견고하게, 오직 주님만 바라보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생각과 달리 빨리 응답되지 않아 답답하고 괴로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그 기도 자리를 포기하지 마시고, 기도의 양을 채워 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섭리 속에 내 뜻과 내 생각보다 더 아름답게 이끄실 것입니다.

오늘은 ‘왜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것 중에 첫 번째 주제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기도의 양을 채워라

기억해야 할 한 문장: 그 기도 자리를 포기하지 마시고, 기도의 양을 채워 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섭리 속에 내 뜻과 내 생각보다 더 아름답게 이끄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나의 간절한 기도제목을 놓고 나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