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도해야 하는가? – <두 번째>

느헤미야 2:1~3

1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 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태복음 6장 7절). 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언부언(重言復言)’이란 말은 ‘같은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율법 교사들이 가르쳐준 ‘~~ 기도’와 같은 의미 없는 종교적, 형식적인 기도를 말합니다. 이런 기도는 지금도 여러 종교에서 심지어 천주교에도 그런 기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 ‘망자(죽은 자)를 위한 기도’까지 있습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제 말씀을 나눌 때, 그 첫째가 ‘기도의 양을 채워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라는 것이 단지 주문이나, 중언부언의 기도와 같은 기도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기도자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와 관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 아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대화’라는 것이 있을 때, 더 친밀해 지는 것과 같이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 깊고 친밀한 인격적 관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이 ‘예수님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러면 매일 기도할 때 어제 했던 기도 또 하면 안 되나?’라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와 대화할 때, 전에 했던 말을 똑같이 하면 그때부터 연을 끊습니까? 또는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어떤 부탁을 할 때, 딱 한 번만 부탁드리고 그다음부터는 입 꾹 다물고 있어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중언부언이란 것은 ‘공허하고 쓸모없는 말’입니다. 주문과 같은 겁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인 것입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오늘은 두 번째로 기도할 때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4~5개월 동안 주야로 금식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에겐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왕의 술관원이었고,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모든 음료와 술을 미리 맛보고 혹시 누군가가 왕을 독살하지 못하도록 막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왕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왕궁의 고위직 신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왕의 허락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신하였고, 더더구나 왕의 생명과 안전에 관해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기 때문에 마음대로 직을 그만둘 수도, 잠시 휴가를 받아 고국인 예루살렘으로 가서 동족을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더더구나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에 관해 수년 전에 아닥사스다 왕이 건축하지 못하도록 왕명을 내리기도 했던 사안이었습니다(스4:21). 때문에 이런 일로 인해서 혹여라도 왕의 마음에 불편함이 생기면, 느헤미야는 아무리 아끼는 신하였어도 죽임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2장 2절을 보시면,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 앞에 포도주를 따르던 신하인 느헤미야가 얼굴 빛이 좋지 않으니, 왕이 “네가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어떤 식당에 갔는데, 서빙하는 분이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서 서빙을 한다면 손님 입장에서 얼마나 불쾌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부터 2,500년 전 페르시아 제국의 왕은 그냥 ‘신적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누구든 왕 앞에 나갈 때 가장 좋은 옷을 입어야 했고, 밝은 미소로,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습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왕비 에스더가 왕 앞에 허락 없이 함부로 나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던 내용을 아실 겁니다. 그런데 왕비도 아닌 신하의 신분으로 왕 앞에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당장 처벌할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하반절에서 느헤미야가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왕이 불쾌하다고 ‘저 놈을 당장 참수해라’하면, 재판이고 뭐고도 없이 바로 목이 베어지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 왕은 그 종을 향해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왕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주어졌을까요? 기도할 때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하니”

느헤미야에겐 어떤 방법도 없었지만,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에 보내는 것도, 수년 전 ‘예루살렘 성벽 재건 금지 명령’을 파기하고, 성벽 재건을 허락하는 것도 오직 아닥사스다 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느헤미야는 용기를 내어 왕에게 그 사실을 말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기도하지 않았다면, 왕이 신하인 느헤미야를 걱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도, 성벽 재건을 허락하는 왕의 명령도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굿모닝 채플[아침 기도회]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던 우리 교회의 ‘갑작스런 성전 이전에 관한 이슈’가 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고, 어쩔 수 없이 내년 4월에는 교회를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저렴한 랜트비를 내고 13년을 사용했던 이 넓은 공간과 비슷한 크기의 예배 장소를 얻으려면, 이 지역 임대료가 엄청 올라서 한화로 약 800만 원 내외의 랜트비를 매달 지출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의 재정적 상황으론 불가능한 겁니다.

처음엔 저도 당황했지만, 주님께서 ‘40일 기도를 다섯 번 하라’는 감동이 있어서, 7월부터 <40일 1차 특별 기도회>가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40일 기도회가 시작된 첫 번째 주에 건물 오피스와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건물 이사회에서 일단은 계획을 보류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은 몇 년을 더 이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언젠가는 여기를 정리하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공간으로 예배 처소를 이동해야 하겠지만, 기도하려고 마음 먹고, 기도를 시작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기회가 옵니다.

이틀에 걸쳐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눴는데, 두 가지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기도의 양을 채워라

둘째, 기도할 때 기회가 온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기도하려고 마음 먹고, 기도를 시작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기도할 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