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기회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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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1:4~9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폴 브랜드(Paul Brand, 1914~2003)’라는 분의 부모님은 정식 의사는 아니었지만, 인도에서 평생 의료 선교를 하시던 선교 사였습니다. 폴 역시 유년 시절을 인도에서 보냈고, 나중에 영국으로 돌아가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가 15세 때, 인도에서 사역하시던 아버지가 열병으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어머니는 인도에 남아서 아버지의 선교사역을 이어 사역했고, 폴은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 서른두 살에 선교사가 되어 그 역시 인도에 들어가 의료 선교를 하게 되고, 우연한 기회에 방문하게 된 ‘나환자(문둥병) 요양원’에서 그가 평생의 소명을 발견하고, 나환자들을 돌보며 사역하게 됩니다.

『왜 예수인가?(Why Jesus), 조정민』라는 책에 보면, 폴 브랜드가 나병환자를 돌보던 중에 경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사역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여보, 신발은 왜 신고 들어와요?”라고 물었던 겁니다. 그 순간 폴은 ‘드디어 내게 나병이 왔구나’싶은 마음에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 그고, 바늘로 발을 찔러 보는데, 통증이 없더랍니다. 나병의 특징은 감각 신경이 손상 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해 손가락이며 코며 다 문드러지기도 합니다.

폴 브랜드는 너무나 절망이 되어 ,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회복시켜 달라’고 밤을 새워 기도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감각이 다시 돌아왔는데, 일시적인 마 비 현상으로 다행히도 나병에 걸린 건 아니었던 겁니다. 그 때 폴 브랜드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고통이라는 감각을 다시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을 땐, 그 고통이 없는 순 간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지만, 역설적으로 ‘고통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을 말 해주는 것입니다.

‘나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은 그래도 아직 기회 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있는 환자 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중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죽은 사람은 도와 달라는 말도 , 신음 소리 조차도 낼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 40년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들은 또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40년을 한결같이 불평과 원망 속에 살고 있는지 참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이들의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서도 아직 기회가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 시고 있습니다.

1. 아직 살길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의 불신앙과 불순종 사건 으로 인해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 늘 본문은 그 40년의 광야 생활 끝에 이제 드디어 가나안 정복을 위해 길을 떠나게 된 상황 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떠나기 직전에 민수기 20장 1절에서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 이 죽었고, 마지막 절인 29절에서는 모세의 형인 아론이 죽 어 장사 되게 됩니다.

그리고 민수기 21장 1~3절까지의 내용에서는 가나안 땅 의 남부에 자리 잡고 있던 아랏의 왕이 가나안 남부 접경지 역에 있던 이스라엘 을 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생각지도 못했던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을 갑자기 치렀던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이끌고 동쪽의 에돔 땅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 요단강을 건너편에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준비 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에돔의 왕이 이스라엘이 그 땅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스라엘)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과의 전쟁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족속은 광야로 다시 들어가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가 에돔의 동쪽 변방으로 멀리 돌아서 가게 된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시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 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필리핀처럼 더운 나라에서 10분만 걸어도 온몸에 땀 범벅이 되는데, 그 험한 광야로 다시 돌아가 그것도 더 멀리 돌아서 가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직진으로 가면 금방 갈 수 있는 데를 왜 돌아가야 하냐. 이건 지도자인 모세가 외교를 잘 못해서 그런 거다.’라는 불만들이 쏟아진 겁니다.

5절을 보시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 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 하노라 하매”

이 구절 상반절에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차적으로는 모세를 향해 원망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지도자인 하나님을 향한 원 망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늘 불평하고, 원 망했던 레파토리 그대로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 도다’라고 불평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 게 있는데,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40년 내내 그들 이 먹고 살았던 쌀과 같은 주식인 ‘만나’를 ‘이 하찮은 음식’ 이라고 말하며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40년 내내 공짜로 주어졌던 주식인 만나가 하찮은 음식은 아닙니다. 사실은 너무나도 고마운 탄수화물 인 것입니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도 쌀독에 쌀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 겁니다. 그런 고마운 만나가 40년 내내 그치지 않았던 겁니다.

요즘 우리 집 앞 도로 약 1km 정도를 새로 깔고 있어서 그 앞이 상습 정체 구간입니다. 제가 저녁 늦게 퇴근하는 경우는 종종 택시를 이용하는데, 택시를 잡고 ‘어디 갑시다’라고 말하면 기사분들의 반응이 시큰둥할 때가 있습니다. 그 지역이 상습 정체 구간이니깐 별로 안 가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미안해서라도 도착 하면 차에서 내릴 때 항상 팁을 더 얹어서 줍니다.

며칠 전에도 교회 앞 도로에서 택시를 잡아서 ‘어디 갑시다’라고 하니깐, 이 기사는 시큰둥 정도가 아니라 한숨부터 푹 쉬면서 계속해서 ‘거기 차가 많이 막힌다. 아이 힘들다. 차 가 너무 많다…’ 차 타고 가는 내내 계속 불평을 늘어놓는 겁니다. 상습 정체 구간 앞에 오니 차가 꽉 막혀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 궁시렁거리는 정도가 더 심해지는 겁니다. 운수업도 서비스업인데, 내가 공짜로 타는 것도 아닌데 손님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니다 싶어서 기사한테 ‘어이 참~ 그만 좀!’이라고 말하려다가 제가 목사라 참았습니다.

그 불평을 들으며 겨우 집 앞에 도착했는데, 팁을 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겁니다. 어차피 잔돈 거슬러 받을 건 생각도 안 했지만 , 한국 돈으로 3백 원 정도 잔돈을 안 받고 그냥 내리려고 하니깐 그 기사가 ‘얼마나 막혔는데 팁을 안 주냐’고 또 궁시렁 거리는데, 제가 ‘응~ 그래’ 그러면서 그냥 내렸습니다. 훨씬 더 많은 팁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 기사는 그 불평불만의 입 때문에 더 많은 팁을 날렸습니다.

지난주에 “쓰레기차의 법칙”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렸었는데, 입에서 끊임없이 부정적인 감정이 섞인 쓰레기와 같은 종류의 말들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취 나는 ‘쓰레기차’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아름다운 입술을 , 여러분의 아름다운 얼굴을 악취 나는 쓰레기차로 만들 지 마십시오.

6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 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하나님께서 40년째 변하지 않는 그 백성들에게 진노하셨고, 광야의 독사가 여기저기에서 출몰해 많은 백성이 물려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다행인 것은 40년째 변하지 않았던 이 백성에게 희망이 아직 있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던 것입니다.

설교 서론에서 잠시 언급해 드렸던 나병(한센병, 문둥병) 환자들은 감각 신경이 손상 이 되어서 통증을 못 느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호미로 밭을 갈다가 손가락을 찍어도 감각 이 없으니, 일하다 보니 손마디 하나가 떨어져 나가 없어져 있는 경우가 실제로도 있다는 겁니다.

통증이 있다는 것,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소망이 있는 겁니다. 죄를 지었는데 찔림이 있다면, 죄책감이 든다면,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부끄럽다면, 주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든다면… 아직 소망이 있는 겁니다. 다시 살길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거짓말 하면서도, 남을 속이면서도, 나쁜 짓을 하면서도… (요즘 우리나라 정치인들 이 생각나지만) 전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건 마치 나병 환자와 같은 영적 감각 기능이 손상된 겁니다.

성선설을 주장한 동양의 철학자인 ‘맹자(孟子, BC 372~289)’는 無羞惡之心 非人也(무수오지심 비인야) 즉,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안다면 소망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건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영 적으로 심각한 질병에 걸려 있는 겁니다. 맹자는 아예 ‘사람이 아니다’라고까지 했습니다.

40년간 불평하고 원망하기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다는 것은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출석하고, 이렇게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교회 밖에서도 완벽한 삶을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분명 실수도 하고,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 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운 마음이 있다면 아직 살길 이 있습니다. 다시 회복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2. 오직 예수뿐이네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 데, 그들은 40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 ‘한결같다’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꼭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늘 변함없고 신실한 좋은 사람을 향해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쓰여질 때,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한결같은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사람 은 참 안 변하는구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화되 지 않는 죄된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 속에 나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모습도 엿볼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저도 신앙 생활을 꾸준히 하면 제가 많이 변화될 줄 알았습니다. 물론, 전혀 변화가 없는 건 아닙니다. 많은 부분에 변화들이 있었고, 말과 태도와 행동과 가치와 삶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변화되기까지는 히브리서 말씀 과 같이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죄와의 혈투’ 정도 가 있을 때 조금씩 변화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 변화되는 게 쉽지 않은 겁니다.

내가 변화된다는 것은 내가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꾸는 것 이고,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것 이고, 내 욕심을 버리는 것 이고, 내가 원하고 바라던 것을 포기할 때… 비로소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포함해 사람들이 이걸 안 하기 때문에, 이걸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 안 변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즉시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한 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광야 40년 만의 큰 변화 중에 하나 입니다. 그래서 아직 소망이 있는 것이고, 아직 살길이 있는 것이고,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백성들은 회개하며, 모세에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더니,

8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라 고 하셨고, 누구든지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장대 위에 매달린 불뱀 모양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9절을 보시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독사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 위에 높이 매달려 있는 그 놋뱀을 바라보니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 14절, 15절을 보시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광야의 놋뱀을 자신에게 비유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놋뱀을 바라보는 것 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왜 놋뱀을 만들어 장대 높이 매달라고 하시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살아난다’고 하셨을 까? 또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그 광야의 놋뱀 사건과 자신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유하셨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셨습니까?

놋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과 불신앙의 죄를 생각나게 하는 상징적인 소품이었던 겁니다. 그 죄로 인해 그들은 뱀에 물려 죽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매달린 십자가는 ‘죄인의 형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도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마다 살아나는 것 입니다.

놋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 장대 위에 매달린 저주의 상징 인 그 놋뱀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 게 살길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어떤 공로와 선행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40년 동안 불평과 원망과 불신앙의 모습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일말의 희망도 없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어쩜 그리도 변화가 안 될까요? 하지만, 다른 공로도, 의로움도, 선행도 아닌 오직 믿음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인생도 오직 예수로 구원받고, 다 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영화에서 세 살짜리 어린 꼬마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수 천 명의 신하들을 거느리며 호화롭게 살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날 황제의 동생 이 “형아, 황제가 잘못하면 어떻게 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린 황제는 “내가 잘못하면 딴 사람이 벌을 받지!”라고 말하면서, 시범을 보이려고 옆에 있던 단지 하나를 깨뜨리자, 즉시 신하 하나가 매를 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필립 얀시’라는 작가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은 이 순서를 뒤집으셨다. 종이 잘못하면 왕이 벌을 받는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다. 은혜란 주는 이가 친히 값을 치렀기에 값이 없는 것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참 연약한 사람입니다. 40년 동안 참 오랫동안 변 화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의 모습과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로 가면 살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 값을 친히 치루셨기 때문입 니다. 내 인생도, 우리 가정도,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도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 다시 살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