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약하나 주님은 강하시다!

느헤미야 6:15~19

15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17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18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19 그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내 말도 그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신념(信念)과 신앙(信仰)’이란 말은 비슷한 말 같지만 다른 뜻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신념’이란 것은 ‘믿을 신(信)’자에, ‘생각할 념(念)’자를 쓰고 있어서,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생각과 가치와 사상과 제도와 기준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문자적인 뜻이 ‘굳게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믿느냐면, 자신의 신념 즉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과 가치를 믿는 겁니다. ‘신념의 기준은 언제나 자기 자신’입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것은 ‘믿을 신(信)’자에, ‘우러를 앙(仰)’자를 쓰고 있어서, ‘우러러 믿는 것’을 말합니다. 신념의 경우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생각과 같은 것을 통해서 생겨난 것이라면, 신앙은 나로부터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의 지식과 생각과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과 그 뜻을 믿고 바라보고 우러르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념과 신앙’의 큰 차이가 하나 더 있는데, 신념은 자기 생각과 가치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신념에는 초월이나 신비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내 지식과 내 능력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능력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초월과 신비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첫째,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남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이 142년 만에 재건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90년 전에 바벨론 1차 포로 귀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차례 성벽을 재건하려고 했지만, 대적들의 방해로 중단되고, 실패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며 기도의 사람이었던 총독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 공사가 단 52일 만에 완공된 것입니다.

16절을 보시면,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에 대한 비전을 받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로부터 대적들은 끊임없이 그것을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와 백성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협박하고, 군대를 동원해 기습 공격을 하려 하고 그뿐 아니라 느헤미야까지 살해하려 음모를 꾸미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일들로 인해 느헤미야와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염려를 주려 했는데, 성벽이 52일 만에 완공되자 도리어 대적들이 두려워하며 크게 낙담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반절에 보면,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즉, 그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성벽 재건의 역사는 사람의 능력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6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념이 아닌, 신앙의 사람입니다. 내 능력과 실력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인인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내게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 내 능력으로 하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하나 주님은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대적들은 외부의 강력한 방해 세력이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조롱과 비웃음과 협박과 모함과 물리적인 기습 공격으로 방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내부적인 방해 공작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즘 시대에 북한 간첩이 어디 있냐? 중국 간첩이 어디있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국가 안보적인 면에서 대단히 안이한 생각과 발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17절, 18절을 보시면,
“또한 그 때에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그들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유다에서 그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사마리아의 총독인 산발랏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암몬 사람 도비야’였는데, 도비야는 유대 사회 안에 들어와 있었던 산발랏의 간첩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도비야는 유대의 귀족 중 한 사람의 사위가 되었고, 또 다른 귀족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유다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도비야 편에 서서 느헤미야에겐 도비야를 칭찬하고, 느헤미야와의 내부적인 정보들을 도비야에게 그대로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느헤미야가 귀족들과 관리들과 나눈 얘기들을 도비야는 다음 날이면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방해와 공작들 앞에서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성벽 재건이라는 대형 프로젝트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데, 안팎으로의 방해와 공작을 극복해 나가면서 이 비전을 이룬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사람인데 왜 안 두려웠겠습니까? 왜 포기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은 사람도, 환경도, 어떤 조건도 아닙니다. 상황이 변하고,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고, 누군가의 강력한 반대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과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면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바라보거나 의지하지 않고, 유일한 의지의 대상인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나 주님은 강하십니다.

여러분이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갈 때, 이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고 계십시오.

첫째,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라.

둘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상황과 환경과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면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바라보거나 의지하지 않고, 유일한 의지의 대상인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나는 약하나 주님은 강하시다는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