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7~12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CCTV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CCTV는 안면인식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거리를 걷고 있는 시민의 얼굴을 3초면 그 사람의 신분까지 다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발달 되었다고 합니다(인권침해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2020년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중국 전역에 CCTV가 약 6억 대가 넘게 설치되어 있으니, 14억 인구 전체를 계속 찍고 있는 겁니다. 중국이 이렇게 CCTV를 많이 설치한 이유는 범죄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공산당이 주민들을 감시하려고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CCTV가 어딜 가나 많이 있는데, 만약 중국처럼 그렇게 주민들의 감시와 통제용으로 한다면 벌써 광화문에서 시위를 하고 난리가 났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범죄예방 차원으로 설치해 놓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치안이 가장 좋은 나라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CCTV든, 누군가가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그런 건 마음이 참 부담스럽고 행동이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139편]은 ‘다윗의 시’로, 여섯 절씩 총 4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시편입니다. 어제 나눈 말씀인 1~6절은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행동과 모든 말들까지도 다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있으면서 이 시를 쓰고 있는 다윗은 그 사실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자신이 어디로 피하든지 거기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순종하고 싶지 않아서,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하나님께서는 지중해까지 따라 오셔서 고래가 그를 삼키게 하시고, 육지에 뱉어 놓게 하시고, 결국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8절과 9절을 보시면,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다윗은 자신이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스올’ 즉 땅 깊은 곳에 자리를 펴고 있어도 거기도 계시고,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뜨는 태양의 빛이 바다 저 끝까지 순식간에 이동하듯 빛의 속도로 저 먼바다 끝에 가 있어도 거기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편재(遍在)하심’ 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모든 공간과 모든 영역 속에 어디든 편재하고 계심을 깨닫고, 그 사실이 CCTV로 감시당하듯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통해 다윗이 깨달은 새로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첫째,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 이란 사실입니다.
10절을 보시면,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중국의 CCTV는 인민들의 감시와 통제를 위해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편재하심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넘어지려고 할 때 붙드시는 안전장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신다고 하니 다윗은 부담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 사실 속에 있었던 은혜를 깨닫고 나니,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인도해 주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어둠을 몰아내시는 하나님.
11절을 보시면,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이 말씀에서 ‘흑암과 밤’이란 것은 ‘인생의 깊은 시련과 고난’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의 날들은 나를 완전히 뒤덮어 버리고, 내 인생을 끝낼 것 같은 깊은 어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시면,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모든 어둠은 빛 앞에 무력합니다. 어둠 가운데 빛이 비추이면 아무리 깊었던 어둠이라 할 지라도 그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하나님께 어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의 인생의 깊은 어둠 가운데 비취실 때 어떤 일이 시작되겠습니까? 그 빛 앞에 어둠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몰아내시는 참빛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 인생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디에든 계시는 하나님’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
둘째, 어둠을 몰아내시는 하나님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믿고 나아갈 때, 우리 인생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통해 주시능 느혜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