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시편 139:13~18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편 139편]의 세 번째 단락은 13~18절까지인데, 이 연에서는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올챙이 시절을 알고 있는 개구리는 겸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고, 우리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육신의 부모님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다윗은 1~6절을 통해서는 ‘나의 생각과 행동과 말을 다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기록했고, 7~12절까지는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3절~18절까지는 ‘우리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께서 나의 장기를 지으시고, 모태에서부터 나를 지으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데, 이 구절에 보면 ‘심히 기묘하심이라’는 말과 ‘기이함을’ 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영어(NIV) 성경에서는 이것을 ‘wonderful’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훌륭한, 굉장한’이란 뜻이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였을 때는 ‘불가사의한, 놀랄만한’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글 성경의 이전 번역본인 [개역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신묘막측(神妙幕側)’이란 말은 ‘(인간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신기하고 오묘해서 감히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과 18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그 놀랍고도 신묘막측한 일을 다윗은 다 이해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시면,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5절에서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

라는 말과 16절의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라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가 모태에서 배아가 되고, 태아가 되기 그 이전의 상태를 즉, 우리가 세상에 세포로서도 존재하기 그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아이들이 엄마한테 물어봅니다. “엄마, 나는 엄마 뱃속에 있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어요?” 보통 교회 다니는 엄마들은 “음… 하나님께서 너를 엄마한테 선물로 주시기 전까지 너는 천국에서 하늘의 별처럼 있었단다” 너무 낭만적이고 아이들이 행복해 할 만한 답일 거 같습니다. 하지만, 낭만을 깨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우리가 모태에 세포와 배아로 존재하기 전까지 우리는 ‘무(無)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깐 세상에도, 천국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정답에 가깝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의 사역이 신묘막측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로 나타난 것 중에 하나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오직 창조주께만 가능한 일입니다.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과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존재의 원인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원인자가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생물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우리 사람의 출생을 보면 너무 놀라운 겁니다. 모태에서 배아가 되고, 태아가 되었는데, 산모는 밥만 먹었을 뿐인데 그 태아는 눈과 코와 입과 귀가 만들어지고, 손가락이 만들어지고, 심장이 뛰고, 여러 장기들이 만들어 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숨을 쉬지 않으면 안 되는데, 태아는 심장은 뛰지만 우리처럼 호흡하지는 않고, 탯줄 하나로 모든 필요를 다 공급받으며 10개월 동안 모태에서 자라나는 겁니다. 신묘막측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보시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가장 잘 아는 이유는 그의 손으로 손수 빗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출생과 성장의 과정과 우리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 아신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무엇이 힘든지, 어떤 필요가 있는지까지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녀들이 뭐 때문에 힘든지, 뭐가 필요한지… 전혀 모르면 무엇을 도와야 할지도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픔과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 무엇이든 돕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넉넉히 도우시는 것입니다. 염려와 아픔을 갖고 우리를 도우실 주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손잡아 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넉넉히 도우시는 것입니다. 염려와 아픔을 갖고 우리를 도우실 주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오늘의 묵상: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나의 기도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