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3~51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집사님의 여덟 살 된 아들 현수가 저한테 ‘목사님, 제가 성경을 읽다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질문해도 돼요?’ 묻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기특해서 ‘그럼~ 뭔데?’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 힌놈의 아들 골짜기가 뭐예요?”라고 묻는 겁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까지 하면 30여 년을 목회자로 살면서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아봤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지명 이름인 건 분명한데, 살짝 창피하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 겁니다. 그래서 ‘잠시만’ 하면서, 바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고 아이에게 간단히 설명해 줄 수 있었습니다.
역대하 28장 3절에 보시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남유다 왕국의 아하스 왕 시대에 암몬족의 몰렉이란 우상을 섬겼는데, 그때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아하스 왕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고대 사회의 여러 우상 숭배에 인신 제사는 종종 있었습니다.
이게 고대 중근동에만 있었던 일이 페루에서 227구의 어린이 유해 아닙니다. 2019년, 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15세기 그곳에서 인신 제사로 바쳐진 아이들 이었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과거 우리나라인 신라의 경주 월성 성벽을 쌓을 때에도 ‘인신공양’이란 이름으로 ‘제방을 쌓거나 건물을 지을 때 사람을 주춧돌 아래에 매장하면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미신을 믿고, 인신 제사를 지낸 사실들은 우리 역사에도 종종 등장합니다.
이런 역사들을 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입니까? 어떻게 사람으로서 이런 말도 안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요? 만약, 지금도 그러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장 달려가서 그 어리석은 부모를 뜯어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이러냐고,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냐고?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이 일은 당신과 당신 가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될 거라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과거 역사 속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전도(傳道 : Evangelism)’라는 말은 ‘교인들 많이 모아 큰 교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전 도란 ‘참된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길이 죄 용서받고 , 하나님의 자녀가 천국과 영생을 얻는 되어, 참된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신 지상 명령이 ‘전도’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의 사명이 전도고,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실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떻게 전도할지, 어떤 마음으로 전도해야 할 지를 살펴보시겠습니다.

1. 와서 보라(Come and see)!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서 30세까지 사시다 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서 공생애를 시 하셨던 초기에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빌립과 나다나엘’이란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빌립까지 갈릴리 바다의 북쪽 마을인 벳새다 출신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시자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그의 말씀과 성품과 모습을 통해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예수님은 보통 분이 아니시구나.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 메시야(그리스도)시구나!’라고 확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메시야의 등장’은 빅뉴스 중에 빅 뉴스였습니다. 빌립의 친구 중에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근 처에 위치한 ‘가나’라는 마을에 살던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이 사실을 꼭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다나엘은 경건한 사람 이었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의 탄생을 늘 사모하던 신실한 사람 이었다는 사실을 빌립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5절을 보시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 사렛 예수니라”
빌립은 나다나엘을 전도하려고 일단 나다나엘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전도하고 싶다면 , 전화로 ‘너 다음 주에 꼭 교회 나와야 한다. 약속해. 꼭! 꼭! 꼭이다!’라고 철통처럼 약속하면 그 사람이 약속대로 교회에 나올까요? 거의 안 나올 겁니다.
뭐든 중요한 것을 말하거나, 중요한 부탁을 할 때는 절대 전화로 하는게 아닙니다. 얼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기 너머로 누군가 부탁을 하면, ‘그래 알았어…’라고 하지만, 사람의 심리가 ‘얼굴 보지 않고 한 약속은 얼굴 안 보면 그만’ 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팸 전화가 많이 오는데, ‘고객님, 좋은 상품 하나 소개해 줄께요’ 그러면 ‘아~ 죄송해요. 제가 지금 바빠서요’ 이렇게 말하며 끊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이 직접 찾아와서 물건도 보여주고 , 맛도 보게 하고, 시연도 해 보이고… 막 그러면 거절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말과 부탁은 꼭 찾아가 만나서 얘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될까 말까 할 겁니다. 그래도 전화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성공률이 높을 겁니다. 사람이 얼굴을 보면서 부탁하면 미안해서라도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화나,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찾아와 얼굴 보며 부탁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는 겁니다.
그리고 빌립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나다나엘을 설득 하려고 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 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소개합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한 메시야 바로 그분이 나타났다고 말한 겁니다.
46절을 보시면,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 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Come and see) 하니라”
빌립은 예수님을 통해 받은 은혜와 감동이 말씀을 들춰가며 많아서 성경 나름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우리 옆 동네 나사렛을 내가 잘 알고 있고, 그 마을 사람들도 여럿을 잘 알지만, 글조차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그 촌구석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메시야는 그런 동네에서 나실 수가 없다. 빌립 네가 뭔 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다’라고 말한 겁니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말로 설득하기엔 지식도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에 성경 말씀과 여러분의 지식을 다 동원해서 진리를 설명 해도 좋겠지만, 그런 경우 빌립과 나다나엘과 같이 ‘논쟁’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논쟁이란 것은 한 사람이 이기고, 한 사람이 지는 싸움이기 때문에 논쟁을 하다보면 ‘옳고 그름 또는 진리와 비진리’를 떠나서 그 싸움을 안 지려 하는 본 능이 발동 하게 됩니다. 때문에 복음 전할 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그 사람을 전문가에게 데려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아픈 사람의 병을 치료해 줄 수는 없지만, 소문난 좋은 의사를 그분에게 소개해 줄 수는 있지 않습니까?
전도자 빌립도 나다나엘과 대화하면서 ‘아, 내 친구 나다 나엘을 복음으로 설득하기는 어렵겠구나…’는 결론에 이르렀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하자, 빌립은 “와서 보라”고 말하고있 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좋은 전도법이 없습니다.
이런 분들이 종종 계신데, 최근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예배하고 있는 성도님도 원래 다른 곳에 한 주간 갔다가 우리 교회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데, 내가 왜 광명교회로 먼저 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 니다. 그래도 이분은 빨리 오신 겁니다. 세부 생활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한참을 교회 안 다니시다가 우리 교회 오셔 서 신앙 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진작에 교회 나올 걸 그랬어 요. 빨리 안 나오고 세월을 보낸 게 많이 후회 되네요’라고 말 씀하시기도 합니다. 직접 와서 보니 갖고 있던 부정적인 선 입견들이 사라지고 너무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말로서 설득하려고 하지도 말고, 어려운 성경 말씀 이것저것을 말하면서 그와 논쟁하지 도 말고, 빌립처럼 ‘와서 보라’고 초청하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전도법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친구와 지인들에게 접 초청해 주세요. 전화로 그냥 오겠지… ‘와서 보라’고 직 라는 안이한 생각 도 하지 마시고, ‘몇 시까지 교회로 와요’라고 약속해도 그 약속이 당일에 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직접 가서 모시고 오시든, 교회 주차장에서 만나서 예배당까지 데리고 오시든 하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겁니다.
그리고 성경적이면서 구체적인 복음은 교회 목사님이 하실 것이고,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전 그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께 서 하실 일인 것입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2.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전도라는 것 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유 는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영혼들을 찾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구절을 통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부인 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구원 받아야 할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라는 도구를 통해서 그 구원받아야 할 영혼 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그들이 그 복음을 듣고 하 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 4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 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말하자, 그 어떤 신학 적이고, 교리적이고, 깊이 있고, 어려운 진리와 말씀을 전하지 않았음에도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성경을 설교하는 사람이지만…, 제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똑똑하고 , 대단한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고, 뛰어난 웅변력을 갖고, 설교까지 유창하게 한 다고 하더라도… 설교로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거를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보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매주 밤을 세워 가며 설교 원고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어렵게 설교 원고를 완성해도, 마지막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아니야 아니야… 이 원고가 아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해…’라는 말을 혼자 하곤 합니다. 그래 서 마지막에는 ‘하나님, 붙들어 주옵소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 소서. 사용해 주옵소서. 도와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전도 역시 내 힘과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서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전도하고자 하는 영혼에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했듯이 ‘와서 보라’ 초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로 오는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8절을 보시면,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 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 예수님께서 자신을 알아보시는 것이 너무나도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어 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전도 하기 전부터 이미 나는 너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49절을 보시면,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존재와 그 신성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구절에서 그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그의 메시야(그리스도)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 하고 있는 것입 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이라는 이야기 가 전개 되고 있는데, 빌립과 나다나엘의 만남 장면 장면 등이 나오고, 빌립이 그를 전도하려 애쓰는 모습도 도 나오 나오고, 나다나엘 이 예수님께로 오는 장면 과 결국은 대면하는 장면 등이 옵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장면이 흐르고 있지만 , 제가 영어 성 경을 살펴보다가 동그라미를 치며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47절) When Jesus saw Nathanael…
(48절) Jesus answered, “I saw you while…”
(50절)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예수님의 눈앞에는 여러 사람들이 길을 오가고 짐을 옮기며 일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놀기도 하고, 가축들은 풀을 뜯기도 하고, 닭이 울고 개 짖는 소리 도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눈에는 나다나엘만 보이는 겁니다. 주님의 시선은 잃어버린 한 영혼인 나다나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던 것에는 주님의 이 소원이 빌립에게도 전해 졌기 때문에, 빌립의 마음에 그런 감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나섰고, 그를 만나 전도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전도는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사람’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지, 그의 직업이 무엇 이든, 그가 과거에 어떤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건, 그의 성격 이 어떻든… 전도자인 빌립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듯, 우리 의 마음에도 그런 감동을 주시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감동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나다나엘을 찾아 나서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일찍이 고아처럼 살았고 , 성격 이 좋지도 않았고, 공부를 잘하거나 , 특별한 재능이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친구도 별로 있었던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내 성적이어서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뭔가 내게 매력적인 게 있어 야 누군가는 나를 주목했을텐데, 제게는 누군가에게 주목 받을 만한 게 정말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교회로 이끌어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 의 고모부뻘 되는 분이 개척한 작은 교회였고, 그 친구가 억지로 끌어주듯 교회에 데려다 놔서 저는 열아홉 살 때 정식으로 교회에 출석했고, 교회에 가자마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교회에 인도해 준 친구는 스물한 살에 교통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저는 그 장례식장에서 통곡하면서 그 친구의 몫까지 사명을 다하겠다고 결단 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제게 빌립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때까지 아무도 저를 주목하지 않던 성장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단 한 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계속 저를 주목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 같은 친구를 저에게 보내셔서 저를 주님께 인도하게 했고,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가 그 빌립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계신 영혼들을 향해 우리를 보내실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또 한 사람의 나다나엘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 와서 보라(Come and see)!
-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