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선한 예배자

창세기 3:1~9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981년 6월 6일, 인도의 <바하르 열차 탈선 사고>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최악의 탈선 사고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약 1,000명의 사람들이 9개의 기차 차량에 탑승했는데, 티켓을 내고 기차에 탄 사람도 있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티켓 없이 열차 차량 지붕에 올라타고 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강의 교량을 건널 때, 7량의 차량이 탈선해 그대로 다리 밑 강으로 추락했고, 이 탈선 사고로 인해 최소 500명이 사망했는데, 시신을 못 찾아 일각에서는 8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주장합니다.

인도 철도 측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사고 원인은 ‘바람이 너무 센 와중에, 열차 창문을 전부 닫고 운행하다가 열차가 바람에 날려 탈선해 사고가 났다’고 했는데, 생존자 중에는 ‘선로에 올라선 소를 피하려고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다가 탈선했다’고도 말했습니다. 어쨌든 열차는 열차가 달려야 할 선로를 벗어나면,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선로가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이 영적인 선로를 벗어나면서(탈선하면서)부터 모든 고통이 인류 가운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가리키는 헬라어를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하는데, 그 뜻이 ‘표적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온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거룩한 선로를 벗어난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닮은 자녀가 너무 멋지거나 예쁘거나,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거나, 정말 착하거나, 크게 성공을 거두거나…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 아버지는 뭐하시노? 너희 어머니는 누구니?’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 최초의 탈선은 에덴의 낙원에서 일어났습니다. 즉, 인간은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났고,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찬양해야 할 인간은 예배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탈선했던 것입니다. 왜 인간이 탈선했고, 왜 인간이 예배자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었을까요?

첫째,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인간의 탈선이 시작된 원인은 ‘탐심’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6~7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관계는 보이지 않는 ‘암묵적 언약’에 의해 맺어집니다. 아무리 친했던 친구 관계에서도 서로 간에 꼭 지켜줘야 할 불문율을 깨면 더 이상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는 겁니다. 아무리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라 할 지라도 서로 지켜줘야 할 ‘그 무엇’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실수와 잘못은 용서해도 ‘그 무엇(예_정절)’을 어기게 되면, 그 관계는 파탄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문율과 그 암묵적 언약이 깨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탐심’인 것입니다. 갖지 말아야 할 욕심을 가진 것입니다.

창세기 3장 6절을 보시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류 최초의 범죄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는데, 그 이상의 것을 탐하는 탐심이 결국 범죄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깟 것 없어도 잘살 수 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최초의 예배자였던 아담과 하와는 탐심으로 탈선한 예배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탐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버렸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져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탈선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버리고, 예배를 멀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자리를 지켜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예배의 자리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자마자 수치와 두려움이 임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이렇게 수치와 두려움을 줍니다. 그래서 어느 날 부터인가 교회에서 점점 보기 힘든 사람은 뭔가 어떤 죄의 문제 때문에 자꾸 교회가 아닌, 예배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숨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9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셨습니다. 이 부르심과 물음은 ‘아담아, 네가 예배의 자리를 떠나 어디에 있느냐? 네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어디에 있느냐?’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배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도 늘려야 하고, 예배의 열정도 더 커져야 하고, 찬양의 소리도, 기도 소리도 더 커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때로 넘어지고 범죄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국 있어야 할 곳은 예배의 자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실수를 했는데, 저기 지방이나 외국으로 도망가 연락 두절이 되면 좋으시겠습니까? 우리가 탕자와 같이 방탕한 삶을 살았더라도 다시 아버지께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바라시는 것입니다.

첫째,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둘째, 예배의 자리를 지켜라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때로 넘어지고 범죄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국 있어야 할 곳은 예배의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내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부분이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