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격적 예배자

창세기 4:1~7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1)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2)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인격의 3요소’를 ‘지‧정‧의(知情意)’ 즉, 지적인 영역과 감정적 영역과 의지적 영역을 말합니다. 지나치게 지적인데 감정이 메말라 있어도 문제고, 지나치게 감성적인데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것도 문제고, 지식과 감정은 충만한데 의지적인 것이 전혀 없어도 건강한 인격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정의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골고루 균형 잡혀 있어야 건강한 인격체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어느 것 하나에만 치우쳐 있으면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해서 지식이 많은데, 기도와 예배와 봉사 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종교적 머리는 큰데 실천하는 믿음이 전혀 없어 깡마른 팔과 다리를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균형이 필요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도 전인격적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제물이 아닌 전인격이다. 오늘 본문의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제사와 예배에 관한 기록입니다. 금단의 열매를 따 먹어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의 낙원에서 쫓겨났고, 그 이후에 임신하여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가인은 성장하여 농사하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축업자가 되었습니다.

3절과 4절을 보시면,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세월이 지나 형인 가인은 추수한 곡식과 과일 등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올려 드렸고, 동생인 아벨은 목축업을 했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올렸다는 겁니다.

여기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비교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지만,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가인은 곡물의 제사라 하나님께서 안 받으셨고, 아벨은 양의 피로 드린 피의 제사기 때문에 기쁘게 받으셨다고 기독론적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일리는 있지만, 이 부분의 강조점은 4절에서 ‘아벨과 그의 제물’이란 표현에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도 ‘가인과 그의 제물’이란 표현입니다.

이사야 1장 13절에 보시면,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제사법이 얼마나 많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제사와 절기와 성회로 모이는 것을 ‘싫어하신다, 가증이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하반절에서 그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들은 온갖 제사를 드렸지만 그들의 삶에는 온갖 악한 일들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견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는 단지 제물의 양과 좋고 나쁨에 관심이 있지 않고, 예배드리는 자의 중심과 인격에 더 관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고 계시고, 우리의 폐부까지 살펴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모르시겠습니까?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어떤 마음과 감정을 갖고 있는지, 어떤 유혹에 넘어지는지, 어떤 말들을 쏟아냈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멀쩡히 교회에 와서는 믿음 좋은 사람처럼 하는 걸 보시면 주님의 마음은 어떠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예배가 참된 예배로 받아들여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의 몸은 교회와 와 있고, 예배 자리에 와 있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과 중심과 인격은 예배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전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매일 주님 앞에서 결단하지만 또 실수하고, 또 범죄할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의지 박약’처럼 느껴지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격이 없지만, 오늘 결단해도 내일 또 넘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또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그 은혜를 구하고, 다시 믿음으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중심과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우실 것입니다.

둘째, 너는 죄를 다스려라.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크게 분노했고, 그 분과 화를 못 참고 화풀이로 동생인 아벨을 돌로 쳐죽이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가인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의지가 약한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가인의 감정을 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감정을 맡겨 버린 겁니다.

7절을 보시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가 즉 마귀가 가인의 감정을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가인이 넘치는 곡식의 제물을 가져왔어도 제물뿐이지 그의 중심과 마음에는 죄가 그를 통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전인격적 예배’라는 것은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최신 찬양곡들과 화려한 음악적 테크닉으로 예배하는 걸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예배, 중심이 담기지 않은 예배는 참된 예배도, 전인격적 예배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에 은혜롭게 예배를 마친 뒤에 우리 일상의 삶과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죄의 통제를 벗어나, 우리가 죄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될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여 매 순간마다 기도하며 나아갈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제물이 아닌 전인격이다

둘째, 너는 죄를 다스려라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에 은혜롭게 예배를 마친 뒤에 우리 일상의 삶과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나는 전인격적 예배자인지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