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 헌신의 예배자

창세기 22:1~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구약의 제사 중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번제(燔祭)’라는 건데, 한자로는 ‘구울 번(燔)’자에 ‘제사 제(祭)’자를 쓰고 있어서 ‘제물을 태워 올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두 가지 단어를 쓰고 있는데, ‘Holocaust’는 헬라어로 ‘동물(holos)’과 ‘태우다(kaustos)’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600만 명의 유태인 집단 학살을 의미하는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영어 단어는 ‘Burnt offering(태워 드리는 헌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제는 제사 드리는 자가 양이나 소와 같은 가축을 끌고 와서 그 머리에 손을 얹어(안수) ‘자신을 대신하여 그 제물이 희생한다’는 의식을 시작으로 제사장에게 희생양을 전해줍니다. 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그 양을 죽이고, 그 양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며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희생양의 몸을 토막토막 각을 떠서 번제단 위에 올려 완전히 태워 올려 드리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자신이 매일 같이 정성껏 먹이고 기르던 가축을 끌고 와서 원래는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그 죄의 값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 양이 대신 희생하는 건 제사 드리는 사람 입장에서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아무리 동물이고, 가축이지만… 얼마나 미안한 일입니까? 그것을 통해 ‘죄가 이렇게 무서운 거다’라는 것을 느끼게 하시려고 이런 방식의 피의 제사를 명령하셨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양으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제사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번제를 통해 말씀하시고 있는 그 완전한 희생의 정신은 우리의 예배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전적 헌신의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테스트를 넘어라.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이란 이름의 뜻은 ‘웃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아들 이삭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노년의 아브라함이 느꼈을 기쁨과 행복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믿음의 시험은 언제나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통해 올 때가 많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을 보시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삭의 나이 대략 열두 살 즈음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시험에는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Temptation)’이란 것과 우리의 인격과 믿음을 단련하기 위해 오는 ‘시련과 연단(Trial)’이란 것이 있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 하려고 하는 ‘시험(Test)’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 하시는 장면입니다.

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구절은 아브라함의 가슴을 마치 칼로 도려내는 듯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음절로 나누자면, ‘네 아들’ / ‘네 사랑하는 독자’ / ‘이삭’ 인데, 그냥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 이렇게 말씀하셔도 되는데, 굳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노년에 늘 기쁨과 행복을 주던 ‘웃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삭’,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둘도 없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믿을 수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정상적인 가정이란 게 없었는데, 제가 결혼해서 첫딸 아이를 낳았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 딸아이는 제게 우주와 같을 만큼 귀하고 예뻤습니다. 그런데 우리 딸이 만 두 살이 되기 전, 알 수 없는 열병으로 두어 달을 앓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방사선 관련 검사들을 비롯해서 그 큰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했었는데, 교수들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답과 ‘소아암일지도 모른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님 앞에
“주님, 제가 이 아이를 육신의 아빠로서만 사랑했었는데, 이젠 이 아이를 믿음과 기도로 양육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를 살려 주옵소서”

라고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했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시험이 올 때,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믿음의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더 강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내게 오는 어떤 믿음의 시험이든 그것을 넘어야 우리는 믿음의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둘째, 전적 신뢰가 전적 헌신이다. 우리 아들이 두세 살 되었을 때, 제가 승용차 지붕에 올려놓고 두 팔을 벌려서 ‘아들아 아빠한테 뛰어!’ 그러면, 이 아이에겐 너무 높은 곳이라 주저 주저 하다가 펄쩍 하고 뛰어 제 품에 안겼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면, 그를 위해 몸까지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던지지 못하는 겁니다.

3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우리가 이 성경 이야기를 잘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모이라 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시면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있으면,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으로, 믿음으로 훈련하실 때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상태로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들어갔듯이 우리를 인생의 광야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인생으로 훈련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광야를 통과한 사람들은 전적 헌신의 예배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첫째, 믿음의 테스트를 넘어라

둘째, 전적 신뢰가 전적 헌신이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면, 그를 위해 몸까지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나를 던지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의 묵상: 나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