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24~30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도 하고, 마음에 어떤 소원과 비전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것에 대한 열망과 소원은 가득한데, 그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그 역사가 나타나기도 전에, 그 비전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포기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과연 내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내게 그걸 주실까? 이런 엄청난 기도까지도 들어 주실까?…’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6~7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포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것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간절함과 절박함이라는 의지가 강한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도 없는 겁니다. 그에게 못할 건 없을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교훈하시고 있습니다.

첫째,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이 주제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12절에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말에는 전후 문맥의 상황에서 신학적 해석이 따르는 표현이지만, 다른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노력도 안 하고, 적극적이지도 않고, 성실하지도 않는 데… 그냥 저절로 잘 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천국에 침노하듯 계속 그 소원과 간절함과 절박함을 갖고 나아가는 사람들에겐 놀라운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 2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
두로 지방’은 ‘베니게(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를 말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기에 이방인들과는 교류를 하지 않고, 그들의 지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좀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에 들어가신 것은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잠시도 쉴 수 없었던 유대 지역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휴식 차원에서 페니키아 지방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의 휴식기에는 특별한 사역을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도 약간의 쉼을 주시려는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25절과 26절을 보시면,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 마을에 나사렛 예수가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수로보니게(시리아-베니게) 족속’의 한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에 엎드렸는데, 귀신 들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길 간구했던 겁니다.
그곳이 비록 이방인 마을이었지만,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것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소문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로 지방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겐 인생의 괴로움과 고통과 질병과 문제는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인생의 수많은 괴로움과 죄의 문제로 시달리던 사람들 중에 두로 지방에서 예수님 앞에 찾아온 사람은 오직 귀신들린 딸을 둔 한 여인뿐이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여러분이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의 간절히 바라는 미래가 있다면… 천국을 침노하듯이 적극적인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목사님들이 떠먹여 주는 이유식만 먹고 겨우 겨우 생명을 연장해 나가시겠습니까? 이제 수동적인 믿음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믿음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섬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로 지방에서 오직 수로보니게 족속의 한 여인만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그의 간절한 소원이 이뤄진 것입니다.

둘째, 자존심과 장애물을 극복하라.
수로보니게 여인에겐 방법이 없었습니다. 딸은 귀신이 들어 매일 매일 사는 것이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으며 피폐해져갔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의 마음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방인 그것도 여성이었지만, 용기를 내어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으면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면, 그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인의 안타깝고도 절박한 그 요청을 예수님은 단칼에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이방인)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거절하셨습니다. 여인 입장에선 유대인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기에 두로 사람을 향해 ‘개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지나치게 혐오적 표현이고,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을 보시면,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반응은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나를 개로 취급해도, 나를 이방인으로서 혐오하더라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29절에서 그 여인의 믿음에 감탄과 칭찬을 하시면서, 귀신이 딸에게서 즉시 나가게 하셨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손을 내밀지 않는 것,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아직 그렇게 간절하지도 절박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지금 내 인생에 대변혁이 일어날 수 있는데, 자존심 때문에 주저주저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것은 큰 문제와 시험에 관한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넘어야 할 것은 우리 내면에 자존심이라는 장애물인 것입니다.

• 첫째,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 둘째, 자존심과 장애물을 극복하라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자존심 때문에 손을 내밀지 않는 것,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아직 그렇게 간절하지도 절박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묵상: 내가 극복해야 할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