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6:4~17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요즘 우리나라 K-Pop 가수들이 북미나 유럽에 가서 월드 투어 콘서트를 했는데 ‘3만 명의 관객이 모였다더라. 5만명의 관객이 공연장에 가득찼다더라’는 소식을 공중파 뉴스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가수 공연에 그만큼 모였다는 게 대단하다는 겁니다. 또는 ‘K-Pop 어떤 노래가 유튜브 조회수 1억 뷰를 달성했느니, 3억 뷰를 달성했느니…’ 하는 것 또한 큰 뉴스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공중파 뉴스에만 안 나올 뿐이지, 예를 들어 호주 시드니에서 매년 열리고 있는 Hillsong Worship Conference에서 불렀던 ‘What a BeautifulName’이란 곡은 유튜브 조회수가 이미 6억 뷰가 넘었고, 몇천만 뷰에서 수억 뷰에 이르는 찬양들이 수두룩합니다.
미국에서 매년 열리는 Passion Conference 역시 수만 명이 들어가는 체육관이 가득찬 상태로 수많은 청년 대학생들이 모여 예배합니다. 그런 컨퍼런스 무대는 웬만한 음악방송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화려하기도하고, 그 무대에서 찬양하는 워십 리더들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교회에서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그런 컨퍼런스나 예배를 보면 적잖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우리도 시대에 뒤떨어진 올드한 예배 스타일을 버리고, 시대에 맞게 예배를 세련되게 드리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값비싼 악기를 추가로 구입하기도 하고, 화려한 음악적 테크닉을 예배음악에 사용하기 시작하고, 강단 인테리어도 음악방송 무대처럼 LED 백그라운드를 설치하고, 화려한 조명과 영상을 준비하는 겁니다. 무대나, 악기나, 음악적인 것을 업그레이드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에 대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의 회중(성도)은 선수이다”라는 겁니다. 성도들이 ‘오늘 예배 참 좋았어요. 예배 잘 봤어요’라고 말할 때가있습니다. 성도들이 마치 경기장이나 공연장에서 관중과 관객의 입장에서 목사님들이나, 찬양팀이 하는 예배를 볼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배의 회중인 우리 성도들은 관중이나 관객이 아니라, 그 무대에서 관객을 위해 공연하는 연기자나 혹은 트랙 위를 달리는 선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의 유일한 관객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찬양팀이 회중들인 성도들을 만족시키는 데 집중하면 안 되는 겁니다.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누구를 기쁘시게 하기를 집중해야 합니까? 예배의 유일한 관객인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데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와 예배 인도자로서 강단에 서는 목사님들 역시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 하면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우리 예배의 유일한 관객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만족시키는데 집중하는 것이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든 백성 중에 가장 존귀한 자리에 있었던 다윗 왕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더 낮아져 비천한 자리에 처하게 된다 할 지라도 예배하기를 멈추지 않으리라’
는 결단이 담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비천한 예배자’ 다윗의 예배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멈출 수 없는 예배자
다윗은 20대 시절 내내 사울 왕의 칼을 피해 도망자로 살다가 사울 왕이 죽고, 그의 나이 30세에 그가 속한 유다 지파의 왕위에 올라 7년간 통치합니다. 그리고 37세에 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되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 국정을 안정 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왕권을 안정 시키자마자 했던 첫 번째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수십년 동안 떠돌던 ‘하나님의 법궤(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든 성물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법궤’ 또는 ‘언약궤’라고 불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는 거룩한 궤를 만들어 그것을 성막의 지성소에 넣어두 모셔뒀었던 겁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도 법궤는 성막의 지성소에 모셔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 중에 그 법궤를 뺏기는 초유의 사태
가 있었고, 그 이후 약 60여년 동안 블레셋 족속의 땅과 이스라엘 땅 여기 저기를 옮겨 다니며 방치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60여 년이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점점 희미해졌을 것이고,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마자 첫 번째 한 일이 바로 산 위에 방치되어 있었던 그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법궤를 이동할 때 율법에서 어긋난 잘못된 방법으로 옮기다가 한 사람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고, 크게 낙심한 다윗은 법궤 옮겨 오는 것을 포기하고 사고 장소 근처에 있었던 오벧에돔 이란 사람의 집에 법궤를 옮겨 놓았습니다.
사무엘하 6장 11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법궤를 임시로 보관하고 있었던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셨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다윗처럼 신앙생활 더 잘해보려고 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생긴다고 쉽게 포기해 버
리면 안 됩니다. 나의 인생에 주님을 모시는 것, 우리의 가정에 주님을 모셔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내리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내 인생과 우리 가정에 결국을 복을 내리시는 선택인 것입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재정비하여 율법의 말씀에 따라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의 다윗 성으로 모셔오게된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 속에 잊혀졌었던 그 법궤를 다윗만은 늘 사모하고 사모했고, 그래서 왕이 되었을 때 그 법궤를 옮겨오게 된 겁니다. 온 이스라엘 중에 다윗만큼 법궤를 옮겨 오는 것을 기뻐했던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족속도 왕과 함께 환호하며 나팔을 불며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6절에 의하면, 사울 왕의 딸이며, 다윗의 왕비였던 미갈이 왕궁 창문으로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 의하면, 미갈은 다윗을 향해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했다’라는 식을 더 강하게 다윗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21 과 22 을 보시면,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 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다윗은 21에서는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22 에서는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과 감사와 찬양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체통도, 체면도, 그의 아내 미갈의 핀잔도,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중의 기도회에 나오시는 우리 성도님들은 담임목사인 제가 기도 시간에 강단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장면을 종종 보실 겁니다. 그럴 분이 없을 거 같긴 하지만, 어떤 성도님은 ‘목사님이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어서 저렇게 맨날 무릎꿇고 엎드려 기도하실까…’라고 오해하실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상관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제가 드리는 경배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보시고, 주님만 제 경배를 받으시면 그만입니다. 제 무릎과 관절이 허락하는 한 저는 계속 그렇게 예배할 겁니다.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에서 12학년 생인 에릭(Eric Harris)과 딜런(Dylan Klebold)은 세상에 대해 지독히도 꼬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불만과 원한과 분노를 품은 상태로 엄청난 양의 총알과 폭탄을 들고, 그들이 다니던 ‘콜럼바인 고등학교(Columbine High School)’로 갔습니다.
그들이 학교로 들어서자 독실한 크리스천인 ‘레이첼 스콧(Rachel Joy Scott)’이 잔디밭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소녀의 다리에 총 두 방을 쏘았고, 상체에 한 방을 더 쏘았습니다. 피투성이의 레이첼이 안간힘을 쓰며 기어 도망가려 하자, 그들은 레이첼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하나님을 믿나?”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녀가 ‘안 믿는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는데, 레이첼은 “(너희가) 알다시피,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대답에 눈이 뒤집힌 에릭과 딜런은 “그러면 그 곁으로 꺼져버려!”라고 소리치며, 총구를 레이첼의 머리에 대고 당겨 버렸습니다.
이 기사를 서술하고 있는 책(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메트 레드맨)에서 이 사건의 결론을 이렇게 말합니다.“섬뜩한 결단의 순간에 그녀는 자신의 생존보다는 그분의 명예를 선택했다”
어린 소녀 레이첼이 총기를 난사하던 두 미치광이 앞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멈출 수 없는 예배자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경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은 이익을 포기하지 못해 신앙을 저버리고 있습니까? 자신의 작은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해 주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있습니까? 참된 예배자는 어떤 상황과 방해와 유혹 속에서도 그리고 레이첼 소녀와 같이 비천한 지경에 빠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2. 다윗의 장막 예배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과 성전’은 가장 중요한 정신적, 영적 중심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스라엘의 성전의 역사를 큰 틀에서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우리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특별한 ‘우상’이나 ‘형상’ 자체가 없습니다. 십계명에서 이미 ‘그 어떤 형상이나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여 섬기지 말라’고 금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며 예배할 곳인 ‘성막’과 ‘성전’이란 것을 만들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건국사에서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이 시작될 때, ‘성막’이란
것을 만들게 하셨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언약궤)’를 만들어 그 성막의 가장 안쪽인 ‘지성소’에 모셔두게 하셨습니다.
성막은 모세(출애굽) 시대부터 약 4백 년 동안 유지되었는데, 다윗 왕가가 시작되기 약 70년 전에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성막이 훼파되고, 재건하고 또 훼파되는 일이 반복되었고, 법궤(언약궤)마저 블레셋 사람들에게 뺏겨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왕이 되어 건물로서의 ‘성전’이 최초로 예루살렘에 건축된 것입니다. 물론, 남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그 성전도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의 장막’이란 특별한 장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출애굽 때부터 수백 년 동안 제사하던 성막은 훼파되었고,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세워질 예루살렘 성전 그 중간에 ‘다윗의 장막’이란게 생긴 겁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겨와서 다윗 궁에 한 천막을 치고 그 안쪽에 법궤를 옮겨 놓은, 임시 성막이며 임시 성전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화려하고 종교적인 어떤 대단해 보이는 장식들이 있었던 게 아니고, 그냥 천막 하나 쳐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시편 27편 4절을 보시면,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의 평생의 소원, 그가 바라는 ‘One thing(한 가지)’는 ‘그의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다윗의 장막)에서 주님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다윗의 장막을 너무나도 사모하고 사모했고, 시간 되는대로 그 앞에 나아가 예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5장 16절을 보시면,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하나님께서 광야의 성막 시절을 그리워하시지도, 예루살렘의 화려하고 웅장한 솔로몬 성전을 그리워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장식도 없고,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도 않은 다윗의 장막 그 임시 성막을 그리워하시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멋진 성전에 집중합니다. 목사님들도 교회 건축을 자신의 마지막 사명처럼 모든 걸 걸고 사역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도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건물이 크고, 시설이 좋은 거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때가 있는 듯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세상적 기준이고, 세속적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천천만만의 번제물보다 참으로 통회하는 진실된 마음과 자신의 중심을 바치는 다윗과 같은 예배자의 마음에 집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 다윗의 장막을 그리워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작년에 제가 예전에 섬겼던 교회의 수요 오전 예배에 가서 설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사랑했고, 거기서 오랫동안 사역했고, 그 교회 성도들과 함께 눈물로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전도하고, 뜨겁게 예배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과거의 그 열정과 눈물과 은혜가 많이 식어진 듯 해서 그날 저는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그 교회에서 예배는 드려지고 있었지만, 우리 하나님은 과거에 작은 교회에서, 뜨겁게 예배하고 찬양하던 그 옛날의 다윗 같은 그 성도들이 얼마나 그리우실까요?
사람은 자꾸 큰 성전에 집중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다윗의 장막을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할 예배는 화려한 음악과 영상과 교회와 대단해 보이는 무엇이 아니라, 다윗의 장막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멈출 수 없는 예배자
- 다윗의 장막 예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