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34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을 ‘대신할 대(代)’자를 써서 ‘대속(代贖)’ 혹은 ‘건질 구(救)’자를 써서 ‘구속(救贖)’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과 대속의 역사를 ‘구속사(救贖史)’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대속의 제물이 되심을 최초로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9절 말씀을 보시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당시 세례 요한은 유다 사회의 영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단강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저분이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시구나! 저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구나!’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이 말은 놀라운 선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죄의 희생 제물’이 아니라, ‘다윗 왕같은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메시야가 나타나 이방 나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여 새롭고 영광스러운 메시야 유다 왕국을 세우실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몰라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며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예고되고 있었습니다.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번제로 희생되어야 하는데, 그 대신에 수풀에 걸려 있었던 양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의 결정적 사건은 유월절이었습니다. 각 가정별로 양을 한 마리씩 잡아 그 피를 뿌리고, 그 양의 고기를 가족들이 먹으면 그 가정은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출애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중에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성경으로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규율들 중에 ‘제사법’이 있는데,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는 반드시 성막에 양을 끌고와서 그 양의 머리에 죄를 전가하는 안수를 하게 되고, 그리고 제사장은 그 양을 죽여 피를 뿌리고 각을 떠서 번제단 위에 희생 제물로 바칠 때, 그 죄가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멀리서 예고하고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 대신에 희생한 그 양이었고, 출애굽의 유월절 양이었고, 광야 시절 속죄의 제물로 바쳐졌던 그 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그림자와 같은 예고편이었고, 2천 년에 걸쳐서 예고된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 제물이 이제 세례 요한의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영적인 직감으로 세례 요한은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33절, 34절에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그러니깐 세례 요한의 눈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이 보여졌던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나 마음과 속이 좁은지 모릅니다. 분명 나보다 더 잘나고 뛰어난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 누군가가 그 사람을 내 앞에서 칭찬하면 그게 나에겐 시기와 질투 열등감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심지어 목사님이라 할 지라도 그런 게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 지역에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깐 ‘어떤 목사님 설교 잘 한다. 참 좋더라’하면서 우리 성도 하나가 그 옆 교회로 옮긴다면, 그게 그 담임 목사님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를 더 모으려 하는 게 아니라 ‘저분이 바로 그 분이다. 저분이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다. 나는 저분의 신발 끈도 못 든다’라고 계속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겐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소명(calling)과 사명(mission)’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부르신 이유는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소명이며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나의 소명과 사명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게 될 때,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말들도 우릴 흔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과 가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길로 가고 있다면 제대로 잘 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조차도 이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희생하시기 위해 오셨기에 그 길을 묵묵히 걸어 가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나의 부르심과 사명을 따라 사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우리 역시 ‘나의 소명과 사명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게 될 때, 그 어떤 상황과 환경과 말들도 우릴 흔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과 가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길로 가고 있다면 제대로 잘 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나의 소명과 사명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