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6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2천 년 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땅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Christmas)’이 있는 주간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던 1세기에 우리나라 한반도에는 ‘고조선’이라고 하는 부족 시대를 벗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왕국(국가)들이 건국되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1세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이렇게 삼국과 함께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국’까지 네 개의 국가가 한반도에 건국이 됩니다.
약 5~600년 가량 존속한 가야의 건국 신화를 보면, 9개의 족장들과 수백 명의 백성들이 각 부족을 통합한 강력한 왕을 보내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자주빛 붉은 보자기에 싸인 여섯 개의 황금알이 내려왔고, 12시간 뒤에 그 황금알에서 사내 아이들이 부화했는데, 그중에 첫 번째로 부화한 아이의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고, 10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약 2m)이나 자라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김해를 본거지로 ‘가야국’을 건국한 ‘김수로왕(金首露王)이 되었다’는 것이 가야의 건국 신화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김수로왕은 오늘날 ‘김해 김씨’의 ‘시조(始祖)’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명 중에 한 명은 ‘김(金)씨’ 성을 쓰고 있는데, 그 김씨의 약 40% 이상
이 ‘김해 김씨’라고 하고, 이들은 모두 ‘김수로왕의 후손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족보 같은 게 요즘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 나라의 건국 신화라든가, 어떤 위대한 인물이나 종교의 교주의 출생 배경같은 것을 보면 이런 건국 신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의 첫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왕국의 정통적 왕인 ‘다윗’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역사의 건국 신화라든가, 위대한 인물에 대한 기록 이라든가, 어떤 종교 교주의 탄생 신화 같은 것들은 모두 신비롭고 좋은 내용만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족보를 읽다 보면 불편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혈통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여러 가지 면에서 감추고 싶을 만한 사건과 인물들의 이름들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인물의 족보도 아닌,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야)의 족보로는 다른 신화와는 달리 함량 미달처럼 보일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적나라한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말씀하시고자 하는 부분이 있으신 겁니다.

1.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약 4100년 전,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갈대아 우르’에 살던 우상 숭배자 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도 가나안 땅으로 인하셨고, 그곳에 정착하게 하셨던 겁니다.

그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고, 이삭 역시 60세에 쌍둥이 아들들인 에서와 야곱을 낳았고,
영적 장자권을 받은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고, 이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 민족과 나라가 건국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다 지파’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넷째 아들이 ‘유다’였고, 이 유다 지파에서 다윗왕도 나오고, 후에 예수님께서도 탄생하시게 된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 약 2천 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는 ‘유태인’의 조상이 ‘유다 지파’인 것입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나 물리학의 아버지와 같은 ‘아인슈타인’같은 사람도 유태인입니다.
3절을 보시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
은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 중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여자의 이름이 ‘다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그 첫째 남편이 죽었고, 그래서 유다의 둘째 아들과 다시 결혼했는데 그 둘째 남편도 죽어 후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다말을 내보내게 후손을 남기기 위해 되는데, 다말은 자신의 유다를 속이고 시아버지인 유다와의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스토리가 있었지만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법적 관계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겁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하는 벌을 받을만한 일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5절을 보시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그 유다가 다말과의 사이에서 난데, 여리고 성의 정탐꾼 중에 한 명 자손의 자손이 ‘살몬’인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그 살몬이 결혼한 사람이 여리고성의 기생(창녀)이었던 ‘라합’이었고, 그의 아들 보아스가 모압 여인 ‘룻’에게서 다윗왕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았다는 겁니다. / 살몬의 아내는 가나안 땅의 여리고성 창녀였던 이방 여인 ‘라합’이었고, ‘룻’ 역시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의 여인 이었던 겁니다. 율법에서 이방인과의 결혼과 혼인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시면,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님의 족보 안에 여러 여성들의 이름이 나오지만, 하이라이트는 다윗 왕에 관한 기록입니다. 다윗은 얼마나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그의 일생에 가장 지워버리고 싶은 죄악 된 사건이 있었는데,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밧세바)를 취한 사건인 것입니다. 만약 이 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당하고도 남을만한 악질 범죄자인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족보에는 남자 이름만 기록하는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굳이 여성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죄악시 여기는 이방 여인의 이름이며,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창녀의 이름이며, 불륜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족보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족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9장 6절을 보시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라기보다, 인간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 성육신 하신 참된 인간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태어난 족보를 보세요. 시아버지와의 불륜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이방인 창녀 출신도 있습니다. 이방 여인도 있고, 부하의 아내를 빼앗은 불륜도 있습니다. 이게 만약 내 인생 속에 일어난 일이라면 생각만 해도 얼마나 부끄럽고, 감추고 싶고, 내 인생 속에서 지우고 싶은 일들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그런 계보 아래에서 태어났고, 이 족보를 통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지파의 첫 조상인 유다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이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예수님의 또 다른 조상 다윗… 그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이며,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신앙 생활하다가 사람 때문에 크게 실망하거나, 큰 시험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당연한 겁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좀 더 착하게 살려고, 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 다닌다고 한 번에 변화될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믿음 좋은 집사님으로 소문난 분이신데 그런 분에게 실망할 일이 없을 거 같습니까? 권사님이고, 장로님이고, 교회 봉사 다 맡아서 하고, 그렇게 기도를 뜨겁게 하고, 무슨 중직을 맡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하나 있는데, 그분 역시 어찌할수 없는 죄인이며 사람일 뿐이란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크게 실망할 일이, 크게 시험들만 한 일이 있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게 다른 사람들만의 이야기겠습니까? 나는 어떻습니까? 주일날 설교 듣고, 크게 감동받아 믿음으로 ‘이제 죄짓지 않으리라! 이젠 좋은 마음, 착한 마음으로 살리라’ 결단했지만, 그 의지와 결단이 얼마나 쉽게 무너져 또다시 실수하고 범죄하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그걸 매주 반
복하고 있으니 그럴 때마다 ‘나는 의지박약인가? 나는 구제불능인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며,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이 필요한 것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 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왜 죄악 된 혈통에서 태어나, 왜 인간 예수가 되셔야 했겠습니까? 이렇게 핏속까지 더러운 인간의 죄를 위해 대신 벌 받으시려, 대신 심판받으시려, 대신 죄값을 치르시려고 인간 예
수가 되신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영적 존재인 신으로서는 대신 벌 받을 수도, 죽으실 수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2. 나의 수치를 가려주셨다

인류 최초의 범죄는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그전까지는 죄가 전혀 없는 순수한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범죄 한 뒤에 3가지 결과가 따라왔는데,
첫째는 ‘수치심’입니다. 창세기 3장 7절에 보니,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옷을 전혀 걸치지 않은 사실을 깨닫고, 수치심을 느끼게된 장면이 나옵니다. 어린 아이들이 세상과 죄의 때가 묻지 않았을 때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사람들은 수치를 느끼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TV 뉴스에 나온 범죄자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 가리기 바쁜 겁니다. 수치심은 죄의 첫 번째 결과로 받게 되는 벌입니다.
둘째는 ‘고통’이 따라옵니다. 하와는 ‘잉태의 고통’을 갖게 됩니다. 평생 임신 가능 기간에 매 월마다 경험해야 하는 생리와 같은 것도 그 벌의 연장선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같은 남자는 평생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의 고통’을 그 벌로 받게 됩니다.
셋째는 ‘죽음’을 맞게 된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지상의 낙원이었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 에덴 동산 안에는 생명나무가 있었고, 그 열매를 먹을 때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범죄한 사람에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늙고, 병들거나, 사고로 결국은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받으신 형벌은 죄로 말미암아 받게 될 세 가지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 형벌 자체가 큰 고통이었고, 결국 그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게 됩니다.
그런데 고통과 죽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속옷은 치마 형식으로 된 것인데, 십자가에 매달리기 직전 예수님의 그 속옷을 군병들이 제비뽑아 나눠 가졌던 내용이복음서에 나옵니다. 십자가 형벌은 죄수를 높은 나무 십자가 위에 발가벗겨 매달아 수치를 주는 겁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 중에 건강한 사람은 3~4일까지도 살아 있다고 합니다.
정신은 멀쩡한데, 발가벗겨 높이 매달려 있으니 남녀노소 누구나 그 밑을 지나가다 쳐다보니, 매달려 있는 죄수의 그 수치심을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해서 그 수치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원래는 내가 지은 죄로 인해 내가 받아야 할 수치와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그 수치를 대신 받으시고, 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4장 7~8절을 보시면,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다윗이 시편 32편을 통해서 고백했던 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말씀에 인용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 렸다시피 다윗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야말로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것입니다. 분명 흉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로마서 4장 5절에 보시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다윗이 한 게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그 희생으로 내 죄가 함께 못 박혔음을 믿고, 그 믿음을 의롭다 하실 예수님을 믿은 것뿐입니다. 분명 흉악한 죄인 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께서나의 죄를 위해 고통과 죽음 그리고 수치를 겪으신 것을 믿음으로 바라 보고, 그 은혜로 구원받음을 믿는 것뿐입니다. 우린 한 게 없습니다.
우린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자주 실수하고, 넘어지고, 또 범죄할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며 또 주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
입니다. 지난 주간에 여러분이 했던 부끄러운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이 가족에게, 교회 식구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면 너무 부끄러워서 어디로 도망가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부끄러워 서 교회도 못 갈 거 같다고 생각될 겁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큰 병에 걸려 고통중에 누워있는데, 마귀가 그 침실로 들어오더랍니다. 마귀는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커다란 두루마리 하나를 마룻바닥에 ‘툭’하고 던지니, 감겨있던 두루마리가 펼쳐지면서 그안에 빼곡히 적힌 목록이 보이는데, 다름 아닌 루터의 과거의 죄들이었습니다.
그 죄 목록을 읽어가던 루터는 절망이 되고, 영적으로 고통스러웠고, 그 죄로 자신이 지금 벌을 받아 고통을 받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마음 깊은 곳에 계신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마귀에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너는 한 가지 빠뜨렸다. 거기에 적힌 모든 죄들이 다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씻어주신다는 사실이다!” 루터가 힘을 다해 소리치자, 교활한 마귀와 죄 목록의 두루마리가 연기처럼 사라지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문제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을 아셨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대신 벌을 받고,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수치를 가려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 나의 수치를 가려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