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10~16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우리가 믿는 신앙을 종교적으로 구분하자면 ‘기독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를 ‘세상의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종교와 기독교 즉, 종교와 복음은 태생부터가 다르고, 뿌리부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복음은 ‘Do(하라)와 Done(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들은 ‘이것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이렇게 해야 천국에 간다.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라는 식으로 수많은 규율과 율법을 지키도록 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수많은 규율과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늘 벌 받을까 봐 두려움과 죄책감에 눌려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Done’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에도 수 많은 율법들이 나오고, 그것을 지키는 게 마땅하지만 율법을 주신 진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려 함’입니다. 십계명이 아니라면 우리가 죄를 죄라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셨고, 다 이루신 그 사실을 믿을 때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Do vs Done’이 종교와 복음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인간의 노력 vs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여러 규율과 종교 의식을 통해서 즉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스스로 구원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종교의 포커스는 결국 ‘자기 자신의 의(義)’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복음은 나는 자격이 없지만, 나는 의롭지도 않지만, 나는 죄가 많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포커스가 내가 아닌 하나님께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어떤 율법의 말씀도 지키지 말고, 방종하며 방탕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찍이 야고보 사도께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2:17)”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서 벗어나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를 통해서 믿음의 진위가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마7:16)”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0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정말 기가 막힌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의 안식일에 관한 해석 중에 하나가 ‘의사는 안식일에 병을 치료하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 그것도 노동의 하나이다.’ 라는 게 있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 구원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스스로 구원을 얻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지금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받던 환자가 치료되었는데, 그들은 ‘그건 됐고! 당신 안식일 범했어! 당신 치료한 의사가 누구요. 그 의사도 안식일 범했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8년 동안 고칠 수 없었던 불치 병자가 치료되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의에 갇혀 살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도 쉽게 하는 겁니다.
1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38년 된 병자가 치료되었다는 그 초자연적인 기적 앞에서도 유대인들은 그때부터 예수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눈앞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고, 놀라운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어도 눈을 막고, 귀를 막고 소리 지르며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반응할까요? 종교와 복음의 포커스가 다른데, 종교는 ‘자기 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이 신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는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포커스가 ‘하나님의 은혜’에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너무나도 분명한 역사 앞에서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야 하는데, 다른 신적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의 출발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게 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실수합니다.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기에 축하받을 일인 것입니다. 자기 의에 갇혀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는 큰 장애물 앞에 있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내려놓고 주님을 인정할 때 우리는 참된 믿음의 삶과 복음의 은혜 아래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자기 의에 갇혀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는 큰 장애물 앞에 있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내려놓고 주님을 인정할 때 우리는 참된 믿음의 삶과 복음의 은혜 아래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혹시 나의 의와 교만에 빠져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