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2:1~5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아마도 많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종종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아무개야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일 겁니다. 어른들은 그 작고 귀여운 아이가 어떻게 자라날지 기대가 되니 궁금한 겁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좋든 싫든 그런 말을 하도 많이 들으니깐 반강제적으로 ‘나는 뭐가 되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런저런 성장기의 환경을 통해서, 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떤 꿈과 인생의 목표를 갖기도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한 마음으로 보내는 아이들도 있을 겁니다.

<꿈 : Dream>이란 말과 혼용해서 많이 쓰이는 비슷한 말이 <비전 : Vision>입니다. 꿈이란 것은 ‘막연히 이루고 싶은 희망 사항’이지만, 비전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비전의 어원 자체가 ‘보다(to see)’라는 뜻이 있는 것처럼, 비전이란 것은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눈이 있다고 내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때로 그것이 내 눈에 뜨이고, 내게 보여야지만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안 보이는데, 내 눈에만 정확하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내 눈에만 그게 계속 밟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적 관점으로 비전이란 것은 ‘내가 발견해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우리의 눈에 뜨이게 하고, 눈에 밟히게 하고, 나에게 자꾸 보여주시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부터 내 마 음에 심어 놓으신 꿈’이라 할 수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꿈 이 내게 비전으로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비전에 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 : Mission>이란 게 담겨있는 것입니다.
어린 목동 소년이었던 다윗은 어느 날 갑자기 사무엘 선지자가 그에게 기름을 붓던 날부터 그를 향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이 어느날부터 다윗의 꿈이 되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비전이며, 사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과 사명의 길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때 , 먼저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훈련하시고 다듬으십니다. 마음의 그릇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큰 영광과 권세 가 주어진다면, 그 영광과 권세는 그 사람을 가장 빨리 망치는 환경 이 되고, 그는 힘과 권력을 사용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파괴하는 무시 무시한 칼을 휘두르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이 하루라도 빨리 왕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이루려 면 그것을 감당할 만한 믿음과 인격이 꼭 필요했고, 그것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그리고 인생의 깊은 광야에서 훈련되어 졌던 것입니다.

1.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 중에 아픈 아이가 있으면 밖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어도 늘 그 아파하는 자식에게 마음이 가 있는 것처럼 ,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생의 고통 속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꿈과 비전을 주실 때, 그냥 우리 한 사람 잘 먹고 잘살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계신 고통 받고있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라고 그런 꿈과 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2장 1~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 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 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 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 량이었더라”
다윗은 사울 왕의 광기(狂氣)의 칼을 피해 사울 왕의 통치 권이 미치지 않는(그가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는) 적국인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했다가 도리어 큰 곤경에 처했었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번 했지만 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이스라 엘과 블레셋 땅의 경계 부근에 있었던 ‘아둘람 굴’로 피신했 습니다. 아둘람이란 이름 뜻이 ‘피난처, 은신처’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그곳은 유독 우거진 산림에 커다란 동굴이 있어 다윗이 몸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모와 형제들이 그가 숨어 있었던 아둘람 굴로 찾아 내려온 것입니다. 사울 왕이 미쳤으니 다윗의 가족들의 생명도 안전치 않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아둘람 굴로 찾아왔는데,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 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 약 400명이 다윗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울 왕은 70세가 넘는 노인이었는데, ‘정신 착란’ 혹은 ‘정신 분열(조현병)’ 증상들을 수년 전부터 앓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다윗과 같은 충신이 없는데, 그를 죽이려 여러 차례 창을 던지기도 했고,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 문에 온갖 비신앙적, 비윤리적인 일들과 온갖 악한 일들을 저 질렀습니다. 그러나 절대 군주였기 때문에 누구도 반항하거나 저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환난을 당한 자’는 사울 왕의 학정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듯 합니다. 그리고 ‘빚진 자’는 당시 흔하게 있었던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이들로 인해 경제적으로 억눌리고 고통을 겪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통치자가 엉뚱한 것에 미쳐 있으니 그 나라 경 제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로 인해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 역시 같은 선상에서 나라가 엉 망진창이 되고 있는데, 왕은 미쳐 있고, 법은 제대로 작동을 안 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원통한 일로 고통받는 이들도 늘어가고 있는데 어디 하소연 할 때가 하나도 없던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억울함과 상처와 아픔으로 슬퍼 하고 괴로워하며 울던 이들 이었습니다.
교회를 처음 개척할 때, 아마도 모든 목사님들이 같은 생각일 겁니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성도들, 믿음도 좋은 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는 충성된 성도 성도들이 모여 교회가 은혜롭게 부흥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런 기대를 갖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를 개척하고서 보니깐,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앞에서 말씀드렸던 그런 성도들은 다 저기 큰 교회로 가는 것 같고, 우리 교회에는 믿음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아픔과 상처와 문제가 많은 성도들만 오는 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아파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 하고, 가정에 문제가 있고, 관계의 문제로 밥 해서 먹이면서 기도해 슬퍼하는 성도들 데려다가 주고, 상담해 주고, 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분들 찾아가 계속 기도하면서 미래의 소망을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착하겠다는 분들은 집도 얻어 나르고 , 중고차 드리고, 이삿짐도 사는 것도 따라다니며 돕고, 뭘 해서 먹고 살지 함께 고민하며 기도하며 알아봐 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힘들어서 여기 생활 포기하고 떠나는 성도들 함께 울며 기도 해 주던 일들이 개척 초기 때는 정말 많았습니다. 여러분이 안 믿으실 수도 있는데 , 그때는 돈 몇 푼을 구걸하러 교회 에 찾아오는 한국 사람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성도들 중에는 어렵고 힘든 분들이 계시지 만, 개척 초기 때와 비교하면 평안하고 안정적인 분들 비율 이 훨씬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요? 어쩌다 보니 개척교회니깐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성도들이 많았던 게 아닙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해 주님의 양들을 먹이고, 양육하게 하셨는데 목자인 제가 양들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고, 힘들 어하고, 울며 겨우겨우 살아가는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양들 의 필요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겠습니까? 개척 초기 때에 그런 상황들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하셔서 양들의 아픔과 눈물을 품고 돌보는 목자로 저를 세우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여 민족의 영웅이 된 청년이었고, 군 대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가능성을 본 귀족들과 유력한 권력자들이 어차피 미처 널 뛰는 사울 왕을 따르느니 미래가 기대되는 다윗에게 붙어 쿠데타를 통해 사울 왕국을 전복하고, 하루속히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럴 법도 한데 그런 귀족들과 부자들과 유력한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 이 원통한 자들… 같은 불쌍한 사람들만 모였던 겁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많이 아파본 사람이 중병으로 투병하는 분의 불안함과 걱정을 이해할 수 있고, 쌀독에 쌀이 떨어져 굶어본 사람만이 배고픈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가정이 깨지고 아파 하는 사람의 마음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 외에는 그게 얼 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 성들의 아픔과 슬픔과 눈물을 모르면 자기 권력에 취해 백 성들을 제대로 돌보는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께서는 다윗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주님의 마음 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길 바라셨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문 제가 많은, 슬픔과 눈물이 가득하고, 억울한 일들이 많은 이 들을 붙여주셨던 것은 그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맡 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도록 인격과 신앙과 마음의 그릇을 준 비시키는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두 주일 전, 어린 딸과 함께 한 달 살기 오신 집사님이 계세요. 세부에 오시기 전에 연락을 몇 번 주고받았고, 필리핀에 오셔서 우리 교회에서 딱 한 번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밤 제게 보이스톡을 하셨는데 제가 일찍 잠들어 전 화를 못 받았었습니다. 아침에 문자가 와있어 보니, 건강하 던 남편이 심부전으로 갑자기 쓰러져 급히 한국으로 들어가신 다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 이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2~3일이 생사의 고비가 될 정도로 위급해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는데, 얼마 전 비록 기계의 힘을 빌려 심장이 뛰고 있지만 다행히 큰 고비를 넘겼고, 조금씩 회복해 가고 있다 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사님은 이 기간을 통해 남편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지금도 간절히 기도 하시고 있습니다.
메신저로 제게 이런 편지를 보내셨어요. “목사님, 잠깐 스쳐 가는 인연이었을지도 모르는 저에게 마음 써주시고, 남편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남편이 병원에 들어갔던 11 일(주일)에 저랑 딸이 광명교회 예배 참석할 수 있었던 게 얼마나 마 음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남편 살려주셨나 봐요. 멀리 필리핀에서 계속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보이스톡으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던 것을 보면서, ‘우리 교회에서 한 번 예배 드리셨는데, 얼마나 위급하고 절박하셨으면 나한테 연락을 하셨을까…’라는 생각에 집사님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 지금도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인이고 아니고는 둘째입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 시고, 보여 주셨으니 이것은 제 비전이고, 제 사명인 것 입 니다. 모여든 400명과 함께 울었던 다윗처럼,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것 을 위해,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저와 우리 교회의 비전이고, 사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2. 싫어도 주와 함께 가라
베들레헴의 원로 중에 한 사람인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고, 그 여덟 번째 막내 아들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막내 아들이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죽이고 , 민족을 구원한 민족의 영웅이 되었고, 그 이후로도 군대의 장군이 되고, 왕의 사위까지 되어 이새의 집은 막내 아들 덕에 ‘명문가’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막내 아들 다윗이 사울 왕의 미움을 받으면서 이새의 집은 이스라엘에서는 ‘역적의 가문’으로 바뀐 것입니 다. 사울 왕이 이새의 집에 군사들을 보내 그 가문을 몰살할 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새는 자식들과 함께 다윗이 숨어 있었던 아둘람 굴로 내려 갔었던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 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 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다윗은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었고, 사울 왕이 수천에서 수만의 군사들을 이끌고 언제든 쳐들어오면 생존 확률이 0%에 가까운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면 연로한 부모님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부모님과 함께 아둘람 굴에 계속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모시고 모압 왕에게 가서, 당분 간 부모님이 모압 땅에 피해 있을 수 있도록 요청을 한 겁 니다. ‘왜 모압 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이유는 나 오지 않지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보아스의 아내가 된 ‘모압 여인 룻’이었기 때문에 어떤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모님을 모압 왕에게 새에서 관망하며 맡기고, 다윗도 모압 땅의 한 요 그 혼란하고 위험한 상황이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시면,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다윗에게 내려왔던 400명 중 에는 ‘갓’이란 이름의 하나님 의 선지자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선지자 갓을 통해서 “이 (모압 땅)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 어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울 왕의 왕궁 은 <기브아>라는 곳이었고, 다윗을 죽이 려는 사울 왕의 광기를 피할 곳이 없어 적국인 블레셋의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피했었지만, 그곳 역시 다윗의 생명을 노리던 이들이 있어 그곳에서 빠져나와 <아둘람 굴>로 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부모님과 함께 있을 수 없 어서 부모님을 <모압 왕>에게 부탁을 하고, 그도 역시 모압 땅의 한 요새에서 그 상황이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유다 땅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겁니다. 그래도 증조할머니 룻의 고향 모압 땅은 비교적 안전했던 것 같은데,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가는 것 은 또다시 불구덩 이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유다 땅에서는 단 하룻 밤도 발을 편히 뻗고 잠을 잔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늘 긴장하며 쪽잠을 자다가 깊은 밤 들쥐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땅 그 어디에도 다윗과 그의 부하들 이 안전하게 머무를 곳, 숨을 곳은 없었다는 것을 뛰어난 전 략가였던 다윗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다윗의 꿈’이기도 했지 만, 그것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기도 했습니다. 그래 서 그것은 다윗 한 개인의 영화를 위한 꿈이기보다 , 하나님께서 비천한 소년 목동이었던 다윗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향한 그 비전 안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싫어도 가야 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 왕자로 40년을 살았었던 모세를 그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시고, 미디안 광야로 인 도하셔서 40년을 양을 치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이 아닌 먼저 광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광야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손만을 잡아야 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될 다윗도 얼마 전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시고 이 광야와 저 광야, 이 동굴과 저 동굴을 돌며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손을 잡아야 살 수 있는 것 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신 지 얼마 안 된 완전 초신자 성도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도 가끔 나오세요 . 얼마 전, 정말 오랫 만에 예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었는데, 그 주간에 이 성도님의 심장에 문제가 생겨 갑자기 쓰러지셨고, 급히 응급 시술(수술)을 받으셨습니 다. 남편은 쑥스러워 교회에는 얘기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필리핀 아내가 다른 필리핀 자매님께 기도 부탁하게 되면서 저까지도 알게 되어 저도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쓰러졌으니 그 젊은 필리핀 아내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일단 응급 수술을 하고 한숨을 돌렸는데, 카톨릭 신앙을 베이스로 갖고 있었던 아내 가 남편 앞에서 ‘하나님 왜 요? 교회를 안 나가다가 지난주에 교회 가서 예배도 드렸는데 왜 이런 일이…? 하나님, 왜요?’라고 말하면서 신앙적 회의 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곳을 처음 나오고 있는 남편이 울먹거리는 아내 완전 초신자인 에게 “여보, 아니야. 내가 교회 가서 그런 일이 생긴 게 아니라, 교회 가서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신 거야”라고 믿음의 말을 하더랍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응급의 상황에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하 나님께서 그 남편의 마음을 터치해 주신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집에서 요양하며 회복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형제님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은 인생의 광야를 걷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손을 붙잡고 나아갈 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싫어도 주와 함께 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