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자로 산다는 것-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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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7:1~7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1)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방학 때마다 한국에서 오시는 집사님 중에 한 분은 직업이 교수님이세요. 그러다 보니 우리 성도들이 그 집사님을 호칭할 때 ‘교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교회에 한국대사관 세부분관 총영사님이 출석하실 때 성도들은 그분을 ‘총영사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들도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시니깐 ‘집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교수님’이나 ‘총영사님’이라고 호칭하기도 합니다.

제가 한국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인천공항에 내려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가방을 끌고 출구로 나가는 중에 어떤 분이 ‘목사님~’하고 부르시는 겁니다. 이번 겨울에 아이들 데리고 세부에서 ‘두 달 살기’를 하다가 귀국하시던 성도님이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저를 보곤 반가운 마
음에 저를 불러 세우셨던 겁니다. 그러곤 ‘목사님, 다음 여름에도 두 달 살기 갈 거예요. 또 뵙겠습니다’ 하시며 헤어졌습니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갑자기 ‘목사님!’하고 부르니깐 저 역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니깐 저는 필리핀에 있으나, 한국에 있으나 제 평생에 ‘목사’라는 직함은 저를 따라다닐 겁니다.

이렇게 나를 부르는 어떤 ‘직함’은 그 사람의 ‘신분’ 혹은 ‘정체성(Identity)’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다윗은 ‘왕’이라는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를 향해 ‘다윗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또 다른 정체성 은 <예배자 다윗> 이었습니다. 3천년 전, 절대군주 시대 의 한 나라의 왕은 모든 권력의 정점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신분을 말해줄 수 있는 이보다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확실한 호칭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향해 ‘다윗 왕’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그가 한 나라의 왕 이전에, 그리고 왕이 된 이후에 도 변함없이 ‘예배자 다윗’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세속적 직함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을지라도, 다윗 자신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의 진정한 정체성을 ‘예배자 다윗’ 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

사무엘하 1~5장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초기 왕권을 강화 한 뒤에 처음으로 했던 일이 여호와의 법궤(언약궤)’를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옮겨 그가 특별히 준비한 ‘천막’에 그 법궤를 안치했습니다. 이것을 ‘다윗 의 장막’이라고 부릅니다.

법궤는 깊은 산 속에 살던 ‘아비나답’의 집에 지난 100년 동안 보관되어 있었고, 100년이란 세월 동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점점 잊혀 가던 성물 이었습니다. 초대 왕인 사 울 왕도 40년간의 통치를 하던 중에 단 한 번도 법궤에 대 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다윗은 400년 전 모세가 시 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이 보관되어 있었던 그 하나 님의 언약궤에 늘 그의 마음이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7장이 시작되고 있는 데, 1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사무엘하 5장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의 즉위 초기인 사무엘하 6장에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 고, 바로 7장이 시작되는데 사실상 이 시기는 다윗왕의 통치 후반기라 볼 수 있습니다. 그가 40년간 왕으로 통치했으니 시간적으로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뒤로부터 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 수십 의 역사를 마치 법궤를 옮겨온 뒤에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있었던 사건처럼 배치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통해 다윗의 주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다윗 이 늘 추구하며 살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말 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하 면서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주변의 모든 원수와 대적들을 무 찔러 태평의 시대를 누리며 궁궐에 평안히 살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시면,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다윗왕 주변의 모든 원 수들을 무찔러 주시고, 다윗왕이 왕궁에 평안히 살게 하셨던 때…’라고 되어 있는데, 어떤 시기에 이런 상황이 있었는지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기에 다윗왕은 궁실 담당 선지자인 나단 에게 ‘선지자님, 내가 요즘 고민이 하나 있는데 나는 이렇게 화려한 백향목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의 언약궤 는 초라하기까지 할 수 있는 저 장막(천막)에 지난 수십년간 놓여 있는 것이 마음이 안 좋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하나님 의 성전을 건축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모든 일들이 형통하고, 평안하고, 아무 걱정이 없으면… 그다음에는 점점 나태해지거나, 기도하지도 않고, 영적으로 교만해 지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게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그런 연약함을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이 부분을 늘 경계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를 잘 따르고 사랑하는 40대 젊은 부부를 한국 에서 만나 카페에서 차를 마셨는데, 형제님이 그러는 겁니다. ‘굿모닝 채플을 듣다가 목사님께서 이러저러한 문제들로 인해 힘드신데, 우리 목사님이 성전도 멋지게 건축하시고 안정적인 목회와 사역을 하시면 좋겠다’는 기도가 나오더라는 겁니다. 1년에 한 번 혹은 그조차도 못 볼 때가 있는데 저와 우리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부부에게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신다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나는 안정적인 목회를 추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걱정거리가 있고, 기도할 제목이 있고, 때로는 시련이 온다 할 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늘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듯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며 영적으로 늘 깨어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주님 과 더 친밀해진다면 안정적이지 않은 것이 저에게도 우리 교회 에게도 좋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대적들을 다 무찔러 주셨고,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고, 다윗은 더 이상 전쟁에 나갈 일도 없었고 왕궁에서 큰 풍요 가운데 평 안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눈에 보이는 풍요와 영 화와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고, 그 힘과 부와 권력을 갖고 주 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 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인 시편 27편 4절을 보시면,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 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이 아름다움을 바라 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은 전쟁에 나갈 때에든지, 큰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 에든지, 전쟁에서 크게 승리했을 때에든지, 큰 영광과 존귀함을 누릴 때에도… 궁궐에 있는 ‘다윗의 장막’ 즉, 하나님의 법궤가 모셔있었던 그 영적인 성전에 그의 마음이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평생의 소원은 승리와 형통과 부와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자로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추구하는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중에 제 생일이 다가오면 아내가 ‘여보, 혹시 갖고 싶은 거 없어요? 혹시 당신한테 꼭 필요한 거 없어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무래도 제 생일이니 이왕이면 제가 평소에 갖고 싶었던 것, 제게 꼭 필요 한 것 그리고 제가 먹고 싶던 음식으로 저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제 대답은 언제나 아내의 기운을 뺍니다. ‘없어 요. 갖고 싶은 것도, 필요한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어요’라고 대답합니다. 괜히 아내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대답하는 게 아니라, 진짜 없는 겁니다.

그래도 제가 좀 더 어릴 때는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필요한 것도 많았던 거 같은데 요즘은 그런 욕구와 욕망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겁니다. 저 역시도 이 부분이 살 짝 걱정이 되면서 ‘내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서 그런가 …, 그러기엔 아직 나는 너무 젊은데 …, 내 정신적 건강은 문제가 없는 거 같은데, 어떤 욕구와 욕망이 없는 건 감정적으로 혹시 장애가 있는 건 아닌가… ?’ 이런 생각도 들곤 합니다.

얼마 전,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에이든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의 『신앙의 기초를 세워라』는 책을 읽는데, 이 책에서 어느 정도의 답을 찾았습니다. 토저 목사님이 어 떤 독일의 철학자의 말을 인용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외부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이 적다고 했다. 외부에서 공급받을 것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속 사람이 파산했다는 뜻이다” (p.43)

이미 마음이 풍요한 사람은 외부로부터 뭔가를 공급받을 이유가 없지만, 뭔가를 외부로부터 지나치게 계속 공급받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속사람이 아주 빈곤한 상태 더 심하게는 속사람이 파산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제가 필리핀에서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큰 부흥을 꿈꿨었는데, 그때의 부흥은 성도의 숫자가 많아지고, 큰 성전도 건축 하고… 이런 종류의 부흥이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은 이 땅에서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합니다. 눈에 보이 는 크고 멋진 교회 건물에 대한 꿈은 이젠 없습니다. 주셔 도 감사하게 잘 쓰겠지만,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제 물로 드리는 예배 부흥이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큰 교회를 목회하고 싶은 마음도, 유명해지고 마음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싶은 마음도, 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제가 다윗만큼은 못 될지라도 매일 예배하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다 보니, 제 생각과 가치가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 다.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다 보니, 어느새 제 마음이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것을 경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 시공간을 초월하는 삶

다윗은 궁중 전임 선지자였던 나단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소원을 말했고, 나단 선지자는 3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 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나단 선지자가 기도해 보고, 응답을 받은 뒤에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던 건 아니었고, 나단의 개인적인 생각 이었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생각하고 말고도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 선지자에게 임 했는데, 5절에서 [쉬운성경]의 버전으로 보시면,
“가서 내 종 다윗에게 이렇게 전하도록 해라. ‘너는 내가 살 집을 지을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소원인 성전 건축에 대해서 단칼에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십대 소년이었을 때부터 믿음으로 골리앗 앞에 나갔던 사람이었고, 사울왕에게 쫓길 때에도 자신의 감정과 욕망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란 놀라운 칭호를 가진 사람 아닙니까?

심지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다윗왕을 지켜보며 영적으 로 보좌하던 나단 선지자 조차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라고 말하면서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전적인 신뢰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아니면 누가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겠 습니까?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 다윗이 성전을 건축할 수 없 다면, 죄 많은 저를 포함해 이 세상 어느 누가 주님의 성전 을 건축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6절과 7절을 보시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 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중에도 ‘건물 성전’이 아니라, 이동식 장막과 성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과 함께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어떤 지도자에게도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궁궐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단 한 번도 섭섭해 하시거나, 책망한 적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에 의하면,
“…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에 충만하신 분이신데, 인간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은 궁궐과 같은 집이라도 그 안에 하나님을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전이란 것은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사실 상 하나님은 그런 건물이 필요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모 든 것을 초월해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종교적 건물에 제한하고, 가두면 가둘수록 성도들의 믿음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 입니다. 성전이라고 불리는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있는 듯하고, 바른 교인으로서의 모습이 있는데 교회 밖에 나가서는 실망스런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과 교회 밖 어디에도 우리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신다 는 초월적인 믿음을 갖고 있으면, 그 성도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삶을 살 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초월적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문신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깡패 같은 사람들 보면 온몸에 새까맣게 문신을 해서 자기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라고, 강한 사람이라고 어필을 합니다. 그런데 진짜 실력있는 사람, 진짜 강한 사람은 굳이 그런 게 필요 없는 겁니다.

내면이 빈약하고 가난한 사람일수록 겉으로 보이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겉에 두른 것들을 통해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내가 이렇게 부자라고, 내가 이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과시하는 겁니다. 하지만, 진짜 내면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굳이 그런 거로 자 신을 과시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에서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넘치고, 그의 표정과 태도만 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 이란 것이 느껴지는 겁니다.

영적인 능력이 없는 성도와 교회일수록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 건물 자랑을 하고, 교인 숫자를 자랑하고 그럽니다. 하지만 진정한 경건은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교인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교회의 영적 능력은 비참할 정도로 무기력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세부는 겨울과 여름에 한달살기, 두달 살기와 같은 영어 캠프들이 있는 곳이라 이 기간엔 방문객들이 많이 있는 편입니다. 지난 겨울에 앉을 자리가 부족해 뒤쪽에 의자들을 추가로 깔 정도로 많은 분들이 방문했습니다. 교회에 좌석마다 성도들이 가득하니 우리 예배 스텝들이 좋으셨나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몇 명 참석했는지 카운트를 하지 않는데, 스텝 중 한 분이 성도들이 몇 명 왔는지 세어봤다 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 뭐 하러 그러셨어요’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진짜 능력은 교인이 몇 명 출석했느냐가 아니라, 기도의 자리에 몇 명이 앉아 있느냐? 마귀를 맞서 그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 있느냐?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리는 사람이 몇 명이 있느냐? 가 그 교회의 진짜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1세기 초대교회는 건물도, 돈도 그리고 어떤 정치 적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뒤집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그 마음에 맞는 자 라고 말씀하셨던 그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는데, 그 소원을 거절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실 땐 그게 없어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법궤가 모셔있었던 초라한 천막 앞에서 드렸던 다윗의 예배가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왜 사도 바울의 병을 고치지 않으셨을까요? 그게 없어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를 통해 나타나는 게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공간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참된 예배자는 시공간을 초월해 주님을 예배 합니다.

여러분, 어떤 공간과 어떤 시간에만 주님이 역사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어떤 상황에서나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시공간을 초월하는 예배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1.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
  2. 시공간을 초월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