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손이 망하지 않는 길

시편 37:23~26

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자손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의 첫 번째 소원이며, 영원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건강도, 인생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해 살아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나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 나를 닮아 있는 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더 좋은 것을 자식에게 주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자손이 망하지 않는 길, 더 나아가 그 자손이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시편 37편 23절, 24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을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할지라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손으로 붙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끝나게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25절을 보시면,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이 시는 다윗이 노년에 지은 시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평생에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망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실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도 고난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아니, 어느 누구보다 큰 시험과 고난을 겪었었던 겁니다.

그러나 24절에서 고백했던 바와 같이 그가 넘어졌으나 아주 엎드러지지 않았던 것은 주님께서 그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자손을 돌보신다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 간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26절을 보시면,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너그럽고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는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지켜 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고, 나눠주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여러분의 자손이 복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손들은 반드시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로 양육한 자녀들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말도 심하게 더듬고, 교회도 부흥이 되지 않고, 교인들 사이에 심한 갈등이 있어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금식 17일 만에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목사님이 금식 기도하다 죽다니요… 그 초라한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보던 사모님과 자식들의 마음은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가족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 절망 속에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우린 정말 그런 상황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목사님의 아들이 서른 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는데, 이분이 우리 한국교회에서 설교자로서 가장 영향력 있게 쓰임 받고 계신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손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제가 공산주의 국가 중에 중국과 베트남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나라들을 갈 때마다 ‘주의 사항’이 있었습니다. 함께 동행했던 목사님이나, 집사님이나 이런 분들에게 ‘교회에서 쓰는 그런 호칭을 쓰면 안 된다.’라는 겁니다. 그 대신에 ‘사장님, 부장님…’ 이런 식으로 써야 한다는 겁니다. 중국에서 한인교회 다니는 성도들끼리도 카톡 같은 건 다 검열이 되는데, 나중에 불이익을 받거나, 추방될 수도 있어서 카톡 할 때도 호칭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는 ‘유물론’에 기초합니다. ‘유물론(唯物論)’이란 것은 ‘영혼과 정신 같은 관념 등을 부정하고 오로지 물질적인 것만이 세상을 이루고 결정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기초인 유물론은 바로 ‘무신론(無神論)’하고 연결이 되는 겁니다. 때문에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이 있고, 종교 중에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반성경적, 반신앙적 이념입니다.

1917년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탄생한 이래로 공산주의 국가와 그 국민들이 잘사는 걸 보셨습니까?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던가요? 이미 역사를 통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와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체제와 시스템과 이론과 이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영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과 나라가 잘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민족이 잘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 속에서 복음이 들어가고, 그 복음이 흥왕한 나라마다 발전하고, 번성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 개인의 역사 그리고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 세상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자손이 망하지 않는 길은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와 그의 집에 하나님의 복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한 문장
한 개인의 역사 그리고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 세상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자손이 망하지 않는 길은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로운 믿음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와 그의 집에 하나님의 복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내가 예수 잘 믿는 것이 나와 자손이 잘되는 길임을 묵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