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아는 자, 은혜를 갚는 자

시편 116:12~19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군사력과 정치적 지지를 등에 업고 벌인 남침전쟁이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우리나라는 일방적으로 밀렸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공산군에게 내줬고, 석달만에 낙동강 너머 부산지역에까지 밀렸었습니다. 다행히 미국의 주도하에 UN산하 여러 나라들이 참전해서, 완전히 공산화 되어버릴 뻔 한 위기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 참전으로 인해 ‘터어키’같은 나라는 ‘형제국가’라는 칭호로 불리어지곤 하는데, 저는 ‘왜, 가장 많이 참전한 나라는 미국인데 터어키만을 형제국가라 하는가?’하는 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조사해 봤더니, 아주 오래전에 우리민족과 가까웠던 ‘돌궐족(오스만 투르크)’이 서쪽으로 이동하며 세운 나라가 ‘터어키’라는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형제국가’라는 어떤 친밀함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터어키’는 형제국가이고, ‘미국’은 정치적 목적으로 전쟁에 참전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형제국가가 아니다’라고 강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목적과 계산이 없이 엄청난 국비를 들여 군대를 파병하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터어키는 15,000명 정도 파병했고, 그 중 7백여명이 전사했습니다. 미국은 총인원 48만여명을 파병했고, 그 중 3만7천명이 전사했습니다. 이렇게 단순비교만 하더라도 미국이란 나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공산화되어서 김일성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렇게 살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이상이 그 전쟁에 참전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이런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 이것을 ‘은혜’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UN 각 참전국에게 빚을 진 겁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고, 또 어찌하든지 보답할 수 있는 기회에 그 은혜를 갚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고, 스승의 은혜를 아는 자가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면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인은 1~11절까지 말씀을 통해 볼 때, 죽음의 고통과 위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냥 시인은 그렇게 망할 수밖에,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죽음의 고통과 위기 속에서 시인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면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명은 하나님 앞에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죽음의 위기 앞에 있다 할지라도 무가치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그렇게 생명이 마쳐진다 하더라도 그 생명이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세에서의 생명으로 이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인은 내가 살아도 죽어도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죽음의 위기 속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 크고 놀라워서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한량없는 은혜를 알기에 그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갚고 싶어 합니다.

-(13절)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절)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7절)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절)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절)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서원을 지킨다’는 것은 ‘약속을 지킨다’는 겁니다. 위기 중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그 기도와 함께 어떤 서원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보통 우리도 어떤 위기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 여기서 저를 구원해 주시면, 평생 주님을 위해 이렇게 저렇게 살겠습니다’하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서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로 죽음의 위기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머리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서원을 갚겠다는 겁니다. 은혜를 알기에 그 서원을 갚는 겁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임을 알기에 그 약속을 실천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보답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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