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을 듣든지”

<열왕기하 19:1~19> 
Breakthrough 40 특별저녁기도회(21)

몇 년 전 어떤 신문에서 정신건강에 대한 기사를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에서 30대 초반 정모씨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이 사람은 남들이 다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었고, 입사 후 2년 동안 열정적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직장 3년 선배가 사사건건 정씨에게 트집을 잡았습니다. ‘머리 모양이 왜 그러냐, 목소리가 너무 여자 같다. 왜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느냐…’ 사소한 것들까지 지적하고,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정씨를 나무랐고, 그 때마다 수치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나니깐 우울증까지 생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배의 괴롭힘을 유서로 쓰고 자살해서 (선배에게) 복수하고 싶다’라는 겁니다(중앙일보,160111).

영국의 철학자 ‘존 오스틴(John Austin(1911~1960)’은 “거친 말은 주먹을 날리는 행위와 같다.”라고 함으로, 잘못된 언어가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국민배우로 불리는 ‘모건 프리먼(Morgan P. Freeman, Jr.,1917~)’과 한 기자와의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기자가 “제가 프리먼 씨에게 ‘검둥이(흑인을 경멸하는 모욕적인 표현)’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죠?”라고 묻습니다. 프리먼은 “아무 일도 없어요.” 그랬더니 기자가 “왜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거죠?”라고 물었더니 그는 “내가 당신에게 ‘멍청한 독일 암소’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요?”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기자는 “그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프리먼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기자 양반이 나를 ‘검둥이’라고 하면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는 당신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예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들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비판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말들 때문에 상처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을 무시하지 못하는 내 감정이 나를 더 상처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는 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통해 여러 가지의 말들을 들으며 살게 되어 있고, 또 여러 가지 상황들 속에 맞닥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듣든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 생명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누가 나를 사랑하는지? 누가 나를 축복하는지? 누가 나를 구원하시는지? 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 14년(39세)에 당시 중동의 패권을 장악해 가던 앗수르는 남유다 왕국을 침략했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 왕 때는 앗수르에게 복종하고 조공을 바쳤는데, 그 아들인 히스기야는 앗수르를 배반하게 됩니다. 이에 앗수르의 ‘산헤립(King. Sennacherib, B.C 705~681)’ 왕은 유다 왕국을 침공했던 것입니다. 앗수르에 비해 유다왕국은 무력하고 힘이 없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이미 유다의 서쪽 46개 성읍은 모두 점령당한 상태였고, 이제 마지막 성인 예루살렘만 남았던 상황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군대장관을 보내 유다 백성들이 다 듣도록 온갖 말로 히스기야 왕을 모욕하고, 그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합니다.

열왕기하 18:32절에서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앗수르 왕은 ‘항복하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고, 곡식과 포도주와 떡과 꿀이 있는 지방에서 너희가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말로 유다 백성들을 회유합니다. 그리고는  ‘(히스기야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는 말로 설득하지만 그 말을 듣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18:35절을 보시면,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중동 지역 대부분을 정복한 산헤립 왕은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던 것입니다. 산헤립 입장에서는 그 주변의 강대한 나라들까지 자신에게 복종했는데, 팔레스틴의 작은 성 예루살렘 함락은 우습지도 않은 일이었던 겁니다.

다행히 백성들은 그 말에 아무 대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왕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말라 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대신들은 왕에게 와서 성 밖에서 있었던 상황들과 산헤립의 말을 전하게 됩니다.

그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갑니다. 히스기야가 얼마나 그 상황을 비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고위 대신들과 제사장 중에 장로들 역시 굵은 베를 두르게 하고 서신을 주어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4절을 보시면,
“랍사게가 그의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하니라”

이사야에게 긴급 중보기도요청을 보낸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에서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앗수르 왕이 무슨 말을 하든지 유다백성들이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로부터 무슨 말을 들으면 그 순간 지고 싶지 않아서 상대방이 기분 나쁠 만한 여러 가지 말을 하지 않습니까? 보통 말을 강하게 내 뱉는 사람은 사실 가진 게 없어서 그럴 경우가 많습니다. 그 순간이 너무 무서워서 소리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말들은 나를 억울하게 모함하는 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보통 우리는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 말을 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들은 얼마 안가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침묵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 때가 있습니다. 아예 그 일에 관해서는 입에 담지 말고,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로서 호소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말을 듣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나라를 위한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6절과 7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말들 때문에 억울할 수 있습니다. 곤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히스기야에게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한 것과 같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3절)”라고 말한 것처럼, 동서남북이 모두 막히고, 그 상황을 해쳐나갈 어떤 소망도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큰 산도 평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이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계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분명 내 눈 앞에 엄청난 일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 인생의 폭풍 때문에 내가 그 폭풍 속에 쓸려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폭풍까지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던 앗수르 왕에게 그 때 소식이 하나 옵니다. 아프리카의 구스 왕이 앗수르 왕과 싸우려 그 옆 지역으로 왔다는 전갈을 받고, 앗수르 왕을 급히 그 도시를 향해 이동합니다. 거기를 떠나면서 히스기야를 모욕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또 다른 서신을 히스기야에게 전달합니다.

그러자 히스기야가 어떻게 합니까? 14,15절입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히스기야는 오만한 앗수르 왕 산헤립의 편지를 성전에 가지고 올라가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히스기야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성전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주님 앞에 올려놓고 기도하는 겁니다. 지금 산헤립의 말들과 지금 히스기야가 처한 상황은 절망과 낙심이 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말들과 상황 속에서도 히스기야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편 55:22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여러분에게 들리는 여러 가지 말들과 여러 가지 상황들 속에서도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 목사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라는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를 붙들어 주는 하나님의 손을 붙드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엄청난 상황 속에서도,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는 폭군 앗수르 왕 산헤립의 협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슨 말을 듣든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사람이 나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 놓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내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상황이 아무리 폭풍과 같은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폭풍까지도 잠잠케 하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 인생의 폭풍 속에 기도의 사람 히스기야 처럼 하나님께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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