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시는 하나님”

<열왕기하 19:20~37> 
Breakthrough 40 특별저녁기도회(22)

대한민국도 CCTV가 많이 설치되어 있는 나라지만, 뭐든지 중국만큼은 아닐 겁니다. 중국의 공공기관의 CCTV 설치 개수를 보니깐, 2017년에는 170만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앞으로 3년 뒤까지인 2020년까지는 400만대로 증설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CCTV가 그냥 일반 CCTV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공지능 기능이 탑재되어 있는 CCTV라고 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인식하고, 그 사람의 나이와 인종 그리고 성별을 인식하고, 차번호만 봐도 그 차의 종류와 운전자의 모든 자료를 한꺼번에 인식하는 겁니다. 그리고 1주일 전 그 사람의 행적까지 추적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친척과 주변인들 그리고 자주 만나는 사람들까지 모두 추적하고 그 자료를 저장해 놓는다는 겁니다. 좀 심하다 싶긴 합니다.

영국 BBC의 중국 특파원인 존 서드워스 씨가 중국에서 CCTV만으로 사람을 찾는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를 실험을 해봤다고 합니다.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중국 공안당국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를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공안당국에서 CCTV를 이용해서 얼마 만에 찾아냈는지 아세요? 딱 7분 만에 그 사람을 찾아냈다는 겁니다.

요즘 CCTV가 너무 많으니깐 사람들이 ‘이제 어디 가서 나쁜 짓 하면 안 되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감시받는 것 같아 좀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CCTV가 범죄예방을 위해 꼭 필요하긴 합니다. 무엇이든 항상 순기능이 있고, 역기능이 있긴 하지만 CCTV를 통해 범죄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 암흑시대에 종교개혁자들이 즐겨 쓰던 라틴어 표현이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입니다. 교황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시대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벗어나 있었고, 성직자들도 타락했고, 중세 교회 역시 암흑시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Coram : ~ 앞에서(In the Presence of)’라는 뜻이고, ‘Deo : Deus 하나님(GOD)’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라는 뜻입니다.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 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굳이 CCTV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데, 그 사실을 믿는데 우리가 어떻게 범죄할 수 있겠습니까?

잠언 15:3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감찰하신다는 것의 영어번역은 ‘Keeping Watch(지켜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악인의 모든 악행을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지켜보신다는 것은 그 악행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의 악행만 지켜보시는 게 아니라, 선인의 선행 역시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사는데 억울한 일을 겪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시련과 시험을 만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악행을 벌하시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을 돌보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도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앗수르는 중동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앗수르의 산헤립 와과 그의 군대를 당해낼 나라와 왕들은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도 멸망했고, 이제 남유다의 46개 성읍이 모두 점령 당했고, 이제 왕궁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 하나 남았는데, 그 성 마저 앗수르의 수십만의 군대에게 둘러싸인 것입니다.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그의 신복을 보내 히스기야 왕과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온갖 말들을 쏟아 놓았고, 2차로 서신을 통해 또 다시 협박과 모욕을 주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앗수르 왕의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올라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짖고 또 부르짖게 됩니다.

그런데 20절 말씀에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선지자 이사야에게 응답의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반절에서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 것이 하늘로 올라가 공기 중에 흩어져 아무 것도 아닌 거 같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나의 기도를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듣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집사님 한 분은 어릴 때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했던 제목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도 그대로 되지 않은 게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찾고 찾아서 결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내가 그 부분을 놓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딱 맞는 배우자를 어디에서 데려다가 내 앞에 나타나게 하신 겁니다.

우리교회의 개척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우리교회는 기도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기도했던 제목 중에 응답된 게 너무 많은 겁니다. 우리는 기도만 했을 뿐인데, 우리에게 그 만한 능력이 없었는데,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셨던 것입니다. 이후로도 우리가 드리고 있는 모든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실 것을 믿습니다.

2001년 10월 2일자 뉴욕타임즈에 난 기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차병원의 차광렬 원장과 컬럼비아의대 산부인과 로저리오 A. 로보 과장이 생식의학 전문지(Journal of Repoductive Health)에 소개한 내용입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의 차병원에서 불임치료를 받은 199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 이 불임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환자들을 모르게 한 상태에서 A그룹은 미국과 캐나다와 호주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이 환자의 사진을 나눠주고 임신에 성공할 수 있도록 중보기도를 부탁해 놨습니다. 그리고 B그룹은 병원에서 받는 불임치료만 받게 하고 특별히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 요청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한 결과가 나온 겁니다. 중보기도를 받으며 불임치료를 받은 여성들의 임신 성공률이 기도를 받지 않고 불임치료만 받은 여성들보다 두 배나 높게 나왔왔던 것입니다.

차광렬 원장과 공동연구자였던 로저리오 로보 컬럼비아대 의대 산부인과 과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연구 결과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이를 발표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두 그룹 사이의 임신율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 기도를 타고 일하고 역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과 문제들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다만 기도 밖에 없어서 기도하지만, 기도보다 더 강력한 저항은 없는 것입니다. 기도보다 더 강력한 해결책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9: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셨던 것입니다. 어제 밤에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그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게이지를 높여라. 얼마나 더 주님을 의지하는가가 승리의 비결이다. 매달리라. 붙들어라.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내가 천사를 보내어 너를 붙들어 힘을 더해 주시라.”

우리는 좀 심한 감기만 걸려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어지러워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얼마나 주님께 매달리고 부르짖는가에 따라서 승리가 결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올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대신 싸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32절과 33절을 보시면,
“그가(앗수르 왕)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그리고 34절에서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28절을 보시면,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앗수르 왕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너무나도 오만하고 교만한 앗수를 왕 산헤립의 그 교만한 말을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즘 몇몇 교회들의 잘못과 목회자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많은 반기독교 정서들이 우리 한국사회에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인터넷 등을 통해서 기독교 기사 아래에 댓글들을 달리는 것을 보면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에 대한 경멸의 말들과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심한 모욕적인 표현들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나중에 크게 후회할 만한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그 교만한 말들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35절을 보시면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밤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침에 보니 앗수르 군사 185,000명이 모두 송장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라는 기록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만하고 교만했던 앗수르의 군대를 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은 산헤립 왕은 남은 소수의 군사들을 데리고 초라하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가 섬기던 우상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칼로 아버지 산헤립 왕을 죽입니다. 왕자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비극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악인의 교만한 말을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입에서 교만한 말들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만한 말들이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늘 겸손한 사람으로 서 있어야 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역대하 16:9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나님께서 지금도 온 땅을 두루 살펴보시는데, 그 중에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부르짖고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것들이었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늘의 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내게는 한계였던 장벽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돌파하게 되고, 내 인생의 한계들을 돌파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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