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아니면…”

<열왕기하 25:8~30> 
Breakthrough 40 특별저녁기도회(29)

우리나라와 미국은 지난 반세기 넘도록 든든한 우정을 과시했었습니다. 그래서 ‘한미 동맹, 혈맹, 우방’ 이란 표현들이 우리에게는 익숙한 말들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순수한 면이 있어서 한 번 사람을 믿으면 계약서도 쓰지 않고 동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 서로 믿고 해야지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좋은 성품을 주신 거 같습니다. 그런데 다 우리 같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그래서 사기도 잘 당하고, 갑자기 뒤통수 맞는 일도 많은 거 같습니다.

경제나 정치 전문가들은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산 자동차, 철강, 반도체, 세탁기… 등등에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은 전 세계와 무역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성향은 이럴 때 좀 충격을 받는 거 같습니다. 우방이면 친구관계라는 건데, 어떻게 친구끼리 그럴 수 있나?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치와 경제면에서는 국가의 이익에 따라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잡았던 손을 놓을 수도 있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거 같습니다. 우리 역시 과거 공산국가인 중국과 수교하지 않고, 대만과 수고하고 있었는데 중국시장이 커지면서 중국과의 수교 조건으로 대만과는 단교를 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외교무대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진실인 겁니다.

이렇게 세상은 철저하게 은혜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계산해 보고 아니면 아무리 친구관계라도 그냥 버려버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잘못했으면 죽을 때까지 미워하고, 그 사람 얼굴 안 보고, 영원한 원수요 적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주로 쓰여 지는 ‘은혜(혹은 은총)’라는 단어는 세 가지가 있는데, 구약에서 ‘헤세드(Chesed)’라는 단어는 ‘자기 백성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란 의미로 쓰여집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이 범죄하고 주님의 뜻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구약에서 ‘헨(Chen)’이란 단어도 많이 쓰여 지고 있는데, 이것은 ‘호의(favor)’ 또는 ‘불쌍히 여기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약에서 쓰여 지는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 ‘카리스(Chari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몇 가지 상징적인 기록들이 나오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해 보자면

룻기에 보면 이방여인 룻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멸시했던 이방 모압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유대인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처갓집에 가서 살아도 되는데, 이 여인이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베들레헴에서 그 지역의 가장 능력 있고 유명한 사람인 보아스 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에 그녀는 보아스의 추수하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처녀도 아닌 과부인 그녀를 아내로 맞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후손으로 다윗 왕이 나오고, 더 멀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시기 때문에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양치기 소년 ‘다윗’은 그 집에서도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양을 치는 가장 비천한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양치기 소년 다윗을 이스라엘의 통치자인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풍요한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왕궁에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포도원에서 일하는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가 ‘아가서’의 주제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오빠들에게 늘 구박받고, 험한 일들이 맡겨졌습니다. 피부는 새까맣게 그을린 전형적인 시골 아가씨였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시대의 왕인 솔로몬이 그 여인을 우연히 본 이후로 너무 깊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양치는 목동의 모습으로 그 여인을 찾아가 그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아가서에 나타납니다. 왕궁으로 돌아온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마차를 보내서 그녀를 궁궐로 데려와 왕비를 삼게 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단지 솔로몬이 사랑한 여인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 지, 하나님께서 비천한 죄인들인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은혜의 사건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은혜의 사건들로 가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이고, 이후로도 그 은혜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40일 동안 나눴던 열왕기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열왕기하 말씀을 통해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치했던 왕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열왕기하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나누면서, 완전히 멸망한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지 간단히 살펴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 의해 눈이 뽑혀 쇠사슬에 매여 비참하게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4주가량이 지났을 때, 바벨론 왕의 신복이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다가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그 흔적을 없애러 온 겁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죄의 결과가 이렇듯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된다는 것을 교훈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 열매는 가장 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몇 가지 사건들을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8절부터 12절까지인데, 이 부분에서는 [예루살렘의 파괴와 포로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4주 만에 예루살렘을 다시 찾은 정복군인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완벽하게 파괴할 목적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정신적 영적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다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도록 예루살렘 성벽을 헐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전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 외에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모든 자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땅이 황폐해지는 것을 막고, 바벨론에 정기적으로 곡물을 바칠 수 있게 하기 위해 비천한 농부들을 남겨두고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리고 13절부터 17절까지는 바벨론 정복군들에게 탈취당한 품목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모든 것들(궁궐의 것들 역시)을 탈취해 가게 됩니다. 453년 전에 건축된 솔로몬 성전 안에는 엄청난 장식들이 있었습니다. 기둥을 비롯한 여러 기구가 놋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16절에 보면 그 모든 기둥과 기구들의 놋의 무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절부터 21절까지는 바벨론의 정복자들이 남은 사람들 중에 조금이라도 반란을 일으킬만한 자들을 모두 잡아다가 처형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8절을 보시면,
“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이스라엘의 정신적(영적) 중심에 있었던 성전의 일을 하는 관계자들과 궁궐의 시종들 그리고 남은 군인들까지 잡아다가 바벨론에 다려가서 처형하게 됩니다.

21절부터 26절은 ‘그달리야의 임시통치’가 나옵니다.

22절을 보시면,
“유다 땅에 머물러 있는 백성은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긴 자라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가 관할하게 하였더라”

그달리야는 과거 요시야 왕의 서기관인 사반이란 사람의 후손이었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순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바벨론 왕은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족 중 이스마엘이란 사람이 부하 10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그달리야와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가게 되는 혼란에 빠진 예루살렘의 마지막 정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결말에 이르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빼앗기거나 잃어버리고, 낮아지고, 비참하게 되고, 죽임까지 당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예루살렘의 역사를 통해 가르쳐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을 보시면,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런데 열왕기하의 맨 마지막 27절부터 30절까지의 문단에 특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벨론 1차 침공 시에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바벨론 왕에 의해 폐위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었던 야호야긴 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폴로로 잡혀간 지 37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55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바벨론 왕이 갑자기 야호야긴을 옥에서 나오게 하고, 바베론에 있었던 어떤 왕들 보다 그의 지위를 높여주고, 죄수의 의복을 벗기고, 일평생 동안 항상 바벨론 황제 앞에서 함께 식사하고, 그가 그의 시종들과 쓸 모든 물건들과 물질들을 공급해주는 것으로 열왕기하를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영원히 거두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일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다시 회복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회복의 서광과 같은 사건인 것입니다.

오늘 40일 기도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동안 많은 죄와 허물로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징계와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아직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열왕기하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고, 그 영원한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 한 사람의 인생 속에, 가정 안에, 우리 자녀 위에, 우리 사업장 위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와 이 도시 위에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고, 회복하시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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