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끝”

<열왕기하 11:1~21> 
Breakthrough 40 특별저녁기도회(13)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통일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교세가 크지 않지만, 일본과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지부를 두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보자면 꽤 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창시자인 문선명이 2012년에 죽었는데, 한국의 가평에서 열린 3주기 기념식에 3만여 명이 참석했고, 인도네시아 부통령 부부, 키리바시 대통령 부부, 통가 부총리, 피지 영부인, 전(前) 우크라이나 대통령, 전 파라과이 대통령, 전 몽골 대통령 등등 해외의 전‧현직 국가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니깐 그 영향력이라는 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이상일 겁니다.

교주 문선명은 자기가 메시야이고, 참부모라는 교리를 펼쳤는데, 그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 교인들은 그걸 믿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칭 재림 메시야인 문선명이 2012년 죽자 서른세 살의 막내아들인 문형진이 2대 교주로 앉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기를 ‘2대 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비 종교 자체가 많은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고, 그 권력과 부와 영광이라는 게 어마어마하다 보니깐 그 안에서 계파간 갈등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2대 교주의 반대파와 손잡은 사람이 초대교주 문선명의 부인(2대 교주의 엄마) 한학자라는 사람입니다. 결국 엄마와 아들이 권력 다툼을 갖게 되고, 엄마는 아들을 내쫓게 됩니다. 그리고 한학자라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독생녀’라고 부르게 하면서 자신을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2대 왕 문형진은 그 엄마 한학자를 ‘사탄의 핏줄이며, 음녀’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이 이해 안 될 때도 많지만, 어쨌든 사이비 교주에게 속아서 그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고 칩시다. 그런데 교주는 알 거 아닙니까? 자기가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왜 저렇게 자신이 메시야니, 2대왕이니, 독생자니… 연기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겁니까?

결국 인간의 ‘탐욕’인 것입니다. 자신을 독생녀라고 하는 저 한한자라는 사람도 1943년생이면 곧 죽을 텐데 왜 저러는 지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탐욕이란 것으로 눈이 가려지면,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없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탐욕의 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탐욕에 눈이 먼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였으나”

아하시야는 남유다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요람 왕과 교류했고,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세우신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예후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의 요람 왕과 남유다의 아하시야 왕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은 예후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 유다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히사야의 형제들 그러니깐 왕자들과 왕족들 42명이 이세벨과 북이스라엘의 왕자들 문안을 갔다가 예후를 만나 그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혼란을 틈타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일어나서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다른 왕의 자손들을 모두 죽인 겁니다. 다윗의 후손들 중에 이제 누구도 왕 위를 이을 사람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달랴는 자기가 남유다 최초의 여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게 됩니다.

아달랴는 바알 숭배자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서, 남유다의 여호람 왕에게 시집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 역시 철저한 우상 숭배자였고, 북이스라엘에 비해 비교적 여호와 신앙을 잘 지켜왔던 남유다에 바알의 신당을 짓고, 우상 숭배를 퍼뜨린 여자였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가나안 지역에서 사람들이 섬기던 신 중에 ‘바알과 아세라’가 자주 나올 겁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알은 남신이고, 아세라는 여신입니다. 바알은 아세라가 낳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바알은 ‘풍요의 신(물질)’이었는데, 당시 농경과 목축이 주업이었던 사람들에게 비를 내려주고, 자연재해를 막아주고, 농사가 잘 되도록 도와주는 풍요의 신인 바알은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세라는 ‘다산의 신(성 : 性)’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은 큰 복으로 여겨졌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부족(씨족) 사회였기 때문에 자식과 자손이 많으면 농사를 짓는 일에도 도움이 많이 되고, 다른 부족이 공격해 들어올 때에도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다산의 신은 당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신이었던 겁니다.

삶의 변화라든가, 윤리와 도덕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들이 내가 필요한 것들만 주면 그만인 겁니다. 이런 걸 기복신앙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 기복신앙이 되어버리면 삶의 변화는 필요 없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부자가 되게 하고, 근심 걱정을 없애주는 신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은 인간의 탐욕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판 바알과 아세라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돈(물질)과 성의 우상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수많은 물질에 대한 탐욕과 성적인 탐욕으로 인해 인간은 점점 더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던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아달랴 같은 사람에게 도덕성이 없는 이유를 아십니까? 왜냐하면 그 신이 풍요와 다산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도덕과 윤리, 삶의 변화, 사랑과 인내, 이해와 배려와 양보… 이런 인격적인 변화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풍요와 다산의 신을 따라 가는데, 그 외의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달랴가 왕의 자손들을 모두 멸절하고 본인은 다윗의 후손도 아니면서 스스로 왕위를 찬탈했던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게 한지라”

아달랴가 왕족들을 죽이는 중에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배다른 누이인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1살 짜리 아들 요아스를 빼돌린 겁니다. 그리고 요아스와 그의 유모를 성전의 한 방에 6년 동안 숨어 지내게 합니다. 그 6년간 아달랴는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왕이 된 아달랴는 바알을 숭배하며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여왕이 바알 숭배자였으니, 당연히 여호와 신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세바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였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와 여호세바는 왕자인 요아스를 양육하며 은밀하게 왕권을 되찾을 계획을 세우고, 때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흘러 왕자 요아스는 일곱 살이 됩니다.

4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많은 백성들이 전통적인 왕이 아니었던 아달랴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여호야다는 군대를 통솔하는 장교들을 불러모아 다윗의 후손인 왕자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는 대관식을 모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달랴가 방해할 수 없도록 전략을 세우고,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왕의 대관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시면,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왕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요아스 왕은 어렸기 때문에 고모인 여호세바와 고모부인 제사장 여호야다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요아스는 여호야다와 여호세바가 이끄는 대로 했던 겁니다. 여호야다는 왕자 요아스를 인도해서 왕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게 되고, 성전에 가득찬 군사들과 백성들은 왕의 만세를 부르게 됩니다.

왕궁에 있었던 아달랴는 건너편에 있었던 성전에서 들리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 뛰쳐나와 성전으로 달려가 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왕자 요아스의 왕의 대관식이 거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역이라고 소리쳤지만, 아달랴는 거기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

그리고 17절을 보시면,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에게 여호와와 언약을 맺어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매”

제사장 여호야다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습니다. ‘왕과 백성에게 여호와와 언약을 맺어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은 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다스릴 것을 언약하고, 백성들이 여호와의 백성으로 살게 할 것을 결단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는 것’은 백성들 역시 왕에게 복종할 것을 언약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인간의 탐욕이 나라를 이끌게 되면 그 나라도 망하게 되는 겁니다. 단체의 장이 탐욕을 부리면 그 단체도 망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 탐욕을 부리면 그 가정 역시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 성경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야다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나라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8절 말씀을 보시면,
“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허물고 그 제단들과 우상들을 철저히 깨뜨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을 수직하게 하고”

아달랴 때문에 지난 6년간 그리고 그 이상 동안 바알의 제사장들과 바알 숭배자들이 활개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다의 개혁을 통해서 백성들은 바알의 신당을 허물고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게 됩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인간의 탐욕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숭배하던 아합과 아세라 그리고 그의 아들 요람과 그와 손잡았었던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죽게 되고,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며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도 그 탐욕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입니다.

야고보서 1:14절, 15절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욕심과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욕심과의 싸움에서 실패하게 되면 그 사람은 사망 즉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탐심)이란 것은 부족(결핍)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의 공간, 즉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공백이다”

탐욕과 욕심은 부족과 결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의 공백과 그 허전함을 이 땅의 있는 것으로 채우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채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은 영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으로 우리의 빈 공간 안에 더 채워지기 시작하면 신기한 일이 시작됩니다.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무엇이 내게 없으면 안달 나던 나의 마음에 평안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40일 특별기도회로 모이고 있는데, 이 40일이 주님으로 더욱 더 채워지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지시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이면 충분합니다’라는 고백들이 시작될 것입니다. 탐욕의 끝은 멸망이지만, 예수로 채워지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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